사북항쟁 43주년을 맞이하여

작성자
노동당
작성일
2023-04-21 14:23
조회
1367


사북항쟁 43주년을 맞이하여

- 현재진행형인 사북항쟁을 되새김한다.


21일은 사북항쟁이 발발한지 43주년이 되는 날이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4일간 정선군 사북에서 광부와 그 가족, 지역주민까지 떨쳐 일어나 노동인권 개선과 부당한 국가공권력에 대항했던 항쟁이다.

당시 광부들의 삶은 처참했다. 탄광노동자의 평균임금은 광산노련에서 집계한 최저생계비 24만원의 64%에 불과한 15만 5천원에 불과했다. 채굴량만큼 돈을 받는 도급제로 임금을 착취당하였으며, 채굴량을 검수하는 과정에서 눈대중으로 적게 계산하고, 생산량과 채굴량의 차액은 회사에서 횡령을 일삼았다.

주탄종유냐, 종탄주유냐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에너지 정책이 주탄종유로 기조를 잡음에 따라 광부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인생 최하류 막장 취급을 받았다.

노동자들이 사는 집은 고지대의 산기슭에 있어서 식수와 생활용수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목욕탕시설도 없었다. 슬레이트지붕에 블록으로 다닥다닥 이어진 연립주택은 6~7평에 불과하여 방 2개와 현관 겸 주방이 고작이었다. 방음, 방습, 화장실, 상하수도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며, 수도와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환경이었으며,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었다.

근로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어서 한 달에 2~3일 밖에 쉬지 못했고, 죽음의 병인 진폐증에 시달렸다. 회사측은 ‘암행독찰대’라는 친위별동대를 만들어 노동자를 감시함으로써 불만을 억누르고,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이간질하였다. 노동자 1천명당 사망자 비율이 일반 제조업보다 20배 높았으며, 이는 당시 미국보다 23.5배, 일본보다 3.6배 높은 수치였다.

어용노조 집행부가 회사 측과 일방적으로 임금인상에 합의하자, 4월 21일 노동자들은 농성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광부들을 감시하기 위해 농성장에 잠입했던 경찰이 발각되어 도망치면서 지프차로 노동자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것을 계기로 광부 가족은 물론 사북의 모든 지역사회가 들고 일어나 4일간 사북을 해방구로 만들었으며, 동학농민항쟁과 광주항쟁에서처럼 스스로 자치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공권력이 없어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사태악화를 우려한 신군부의 계엄당국은 노사정협상을 서둘렀고, 11개 조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계엄합동수사단은 사태수습에 경찰이 실력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깨고 5월 6일부터 불법연행을 시작하였다. 합동수사단은 항쟁 참여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며 또 다시 무자비한 국가폭력의 야만성을 드러냈으며, 항쟁지도부와 참여자들을 ‘폭동’을 일으킨 범법자로 만들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폭력의 부당한 행사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이었으며, 단순한 근로조건 투쟁을 넘어서서 노동자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유신독재의 와해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민주화 요구가 꿈틀대던 분위기 속에서 80년 당시 학내에서만 머물던 학생운동이 가두로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투쟁이었다. 유신독재 하에서 철저하게 억눌려왔던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여 동원탄좌의 하청업체 천여 명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어냈으며, 전국적으로는 일신제강, 인천제철, 대한광학, 일신산업, 동국제강, 부산파이프 등으로 들불처럼 파업이 번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폭동’이라는 어두운 누명은 20년도 더 지나서 벗겨졌다. 노조 지도부였던 이원갑, 신경씨 등은 2005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서 국가는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사북항쟁은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 노동자의 인간성 회복운동, 80년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사북사태’로 불리며 같은 시기에 발생했던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과 달리 가장 늦게 명예회복을 했다.

뒤늦은 명예회복으로 사북항쟁이 끝난 것은 아니며, 현재진행형이다. 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의 광풍에 밀려 폐광이 진행되자, 광부들은 일자리를 찾아 당시 조성되기 시작한 안산의 반월공단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그리고, 2014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 중에는 광부의 후손들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사회에서는 가장 아래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노동계급이 대를 이어 희생되고 있다.

사북항쟁 43주년을 맞이하여 반복되는 노동계급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늦은 만큼 더욱 더 많은 관심과 되새김이 필요하다.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광부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2023. 04. 21

노동당 대변인 이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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