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대중의 결합

작성자
홍조 정
작성일
2022-03-12 13:02
조회
229

지도와 대중의 결합

영도자의 올바른 지도에 의해서만 민중이 역사의 참다운 주체, 자주적인 주체로 될 수 있다는 것은 피로써 얼룩진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의 교훈에서도 인식되는 진리입니다.
일제침략를 반대하며 백의동포, 민족전체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고 일어난 거족적인 3•1운동 역시 올바른 영도가 없었던 탓에 삼천리강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고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3•1운동의 ‘지도자’로 자칭하던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들은 명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총독부에 “우리들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은 명월관 지점에 회동하여 포박을 기다리고 있다” 고 전화를 걸고 자수해 서명자 중 4명을 제외한 29명이 자동차로 연행되어 경무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정도였으며 오늘도 사람들의 통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애국문화개몽운동도, 국채보상운동도 해보고 구미세력에 기대를 걸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할복으로 호소도 해보았고 이등방문을 처단하는 개인테러도 해보았습니다. 민족의 갈망을 안은 이 모든 투쟁은 한낱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삼천리강토를 피로 물들이며 쓰러지면서 가슴치며 부르짖은 외침은 민족, 민중을 광복의 길로 이끌어 주고 세계의 정상에 내세워 줄 위대한 영도자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위대한 영도따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조국광복의 민족사적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올바른 영도를 받을때에만 민족, 민중은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로 될 수 있으며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해 줍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와같이 민중의 자연발생적 운동이 실패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지도와 대중의 결합의 필요성이 절감되는 것입니다. 민중에 대한 지도문제는 어떤 사회역사적 운동에서나 다 제기되지만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더욱 절실한 문제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광범위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 온갖 착취와 압박을 종국적으로 청산하기 위한 가장 심각한 사회변혁운동이며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민중이 참가하여 진행하는 고도의 의식적, 조직적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전진운동에 적으나마 이바지한 민중의 사회적 운동을 보면 다 이러저러하게 선각자들의 지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출현하기 이전시기 민중운동을 지도한 선각자들이란 많은 경우에 신흥세력에 속하는 착취계급의 대표자들이었으며 근로민중의 근본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체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적, 세계관적 한계성으로 하여 광범위한 민중을 하나의 사상의지로 의식화, 조직화할 수 없었으며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일시적 동반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역사의 자주적 주체는 선진적 노동자계급이 출현하고 그들의 자주적인 혁명사상에 의하여 근로민중이 의식화, 조직화됨으로써 비로소 역사무대에 널리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전체 2

  • 2022-03-23 14:59

    위대한 지도자는 역사를 바꾼다. 지도자가 되려면 실패한 혁명을 연구 하고 실천속에서 교훈을 만들어내라!! 동학농민혁명에서 교훈을 얻어내라!!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 서명 낭독자들이 일황국주의에 투항한 것은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이 없어서 입니다. 당시 조선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을 두고 외부 충격론자와 내부 수용자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갑신정변 등으로 일시적으로 개화파가 승리하였으나 국체를 두고 계급내전을 벌였습니다. 그 첫 사건이 갑오농민전쟁이었습니다. 식민지 합방 직전 봉건 조선에서는 아직 자본주의 생산력이 도입되지 않았고 신사상만 먼저 따로 들어왔는데 민주주의 입헌군주제 정체를 둘러싸고 조선의 자주력과 미일, 청러 간의 각축전의 틈바구니에서 자체적인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못해 개화파의 사상은 뜬구름 안개같았고 미증유의 공상주의였습니다. 양반제를 혁파하려는 민중의 봉기와 더불어 농민들의 혁명의지를 실현할 산업기반과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지 못함으로써 부르주아 혁명도 없는 미숙아 민중 상태에서 민족자주 자결권의 선포차원에서 3.1운동이 발발하였지만 이 대립이 아직까지도 내전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황국고종과 입헌군주파의 몰락은 이처럼 내적인 준비이외에도 열강 외세의 개입으로 왕권개혁은 좌절되었고 대한제국은 외세에 의해 분할 피탈되고 한일병탄이 이루어 집니다. 개화파와 대중들은 민족정기 수복을 내세웠지만 생산양식은 아직도 봉건농업이 우세하였고 선비가 봉건제 관료 국가를 대신했습니다. 미영일러로부터 자본주의와 신사상을 도입하려는 민주주의 민족일파 개화파는 숫적으로 입헌황제파와 왜세추종파에 비해 조직화가 미미하였고 혁명을 기획하고 추진하기에는 노동계급과 민중운동이 없어 십여명의 학자관료뿐인 개화파는 세력으로나 생산의 정부 구성 조직력으로나 따져보아도 역부족이었고 그결과 3.1자주대오는 일본군의 군함과 순사들의 총칼 앞에 참혹히 무너졌습니다. 이후 임정관료들은 외세에 대해서 항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천력이 필적하지 않았고 한말의병에 비해 한치도 개혁되지 못했고 또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실천력 또한 빈약했습니다. 자주는 말로 되지 않습니다. 자주는 생산양식이 최소한 자본주의적으로 대공업이 발전하여야 하고 자본주의로부터 태동한 개혁세력이 물적기반을 가지고 민주주의혁명에 의한 사회주의적 정치 제도에 의해서 집권해야 합니다. 그 당시 자주대오는 3.1운동을 제외한다면 몇명의 의열단 뿐이었고 좌파나 혁신 정당이 없어 모든 물적 투쟁기반은 존재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이런 상황에서 러중의 반봉건 혁명에 힘입어 작은 무장독립세력과 항일 무장투쟁은 만주에서 발아가 시작되었고 중일전쟁과 만주국수립에 반대하는 소수의 빨치산 부대가 자본주의 전제주의로 개화한 황국 일본군의 대동아 세계 침략과 약소민족 억압 피탈에 맞서서 총을 들었고 훗날 자주독립의 위용 항일무장부대로 발전합니다. 조선이 사라지고 이땅에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다시 좌우의 대립과 함께 민족과 자주의 사회민주주의 대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혁명적 사상은 인간해방을 허용하는 자주이고 혁명적 실천은 생산의 민족주의 성격에 조응하는 사회주의계획생산과 정치투쟁의 반제 정부적 운동과 한민족 통일체제입니다. 한말 의병활동으로부터 시작된 개화와 반외세 자주 대한제국 붕괴와 한일합방 그리고 45년 해방기까지 민족자주적 관점에서 한국의 봉건개화기 근대사에 대한 민족민주적 관점수립과 일제항쟁기 사회민주주의 그룹의 탐구 학습 그리고 다시 과학적 노동운동의 입장에서의 연구활동이 절실합니다. 80년대초기 집단생산의 가능성이 열림으로써 이를 미래의 생산으로 간주하고 과거를 합목적적으로 바라보고 연구하여 자료비평을 실천문학과 접목시켜 민족자주 민중민주 정식화를 토대로 역사적으로 민이 생산을 이끄는 시대 그 민족 고유의 자주의식이 형성되는 시대가 되기까지에 우리는 70년 분단 기간의 탈자주에 대한 사상투쟁과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서 근대개화기부터 벌어진 민족해방운동사와 조국광복사에 대한 고찰과 한민족 자주사관 수립 그리고 일제하 사회주의 전위당 조직화와 실패에 대한 비평과 실천적 대안을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물론 남도 북도 주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으로 생산에서의 자주독립과 정치사상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자주사상을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 2022-03-23 15:22

    갑오농민전쟁 | 정창렬 저작집 1
    정창렬저작집 간행위원회 (엮은이)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2014-01-20

    책소개

    '정창렬 저작집' 1권.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권위자이자 진보적 민중사학자였던 정창렬의 연구 가운데 갑오농민전쟁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발표된 것들이다. '갑오농민전쟁연구 - 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한 비교',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관계',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목차

    갑오농민전쟁연구 ― 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
    1. 서론
    2. 동학사상의 역사적 성격
    3. 교조신원운동과 금구취당
    4. 고부민란
    5. 제1차 농민전쟁
    6. 집강소의 개혁정치
    7. 제2차 농민전쟁과 농민군의 몰락
    8. 결론 - 갑오농민전쟁의 성격

    동학농민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한 비교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관계

    동학농민전쟁인가 갑오농민전쟁인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저자 및 역자 소개

    정창렬저작집 간행위원회 (엮은이)

    ·정창렬
    1937년(만주 출생)~2013년 1월 20일(별세)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편집위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한국사연구회 회장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교수

    ·정창렬저작집 간행위원회
    성대경(성균관대) / 김태영(경희대) / 이완재(한양대) / 서중석(성균관대)
    김인걸(서울대) / 강진갑(경기대) / 김도형(연세대) / 이석규(한양대)
    반병률(외국어대) / 박찬승(한양대) /김명숙(동덕여대) / 정태헌(고려대) / 구만옥(경희대)
    최근작 : <정창렬 저작집 세트 - 전3권>,<민족 문제와 역사 인식>,<민중의 성장과 실학>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간 정창렬(鄭昌烈)!
    그는 일상에서도 불필요한 수식을 될수록 멀리하면서 본래의 민낯 그대로를 살아가고자 하는 편이었다. 그의 아호의 정착 과정이 그것을 증언한다. 1970년대 중반 우인(于人) 선생의 문하에서 한문공부를 하고, 벽사(碧史) 선생을 모시고 다산연구회를 결성하기에 이른 친구들 사이에는 서로 호(號)를 지어 부르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칭호’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무호(無號)’라든가 혹은 ‘물호(勿號)’로 불러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 결국 후자로 귀결하였는데, 그조차 그는 한동안 외면하였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다보니, 별 수 없이 그의 아호는 ‘물호’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가 진학한 1950년대 후기는 아직도 대학생이 또래의 5% 미만이었지만 모두 궁핍하고, 지향할 곳도 막연하였다. 이윽고 젊은이들의 의욕을 크게 고취시킨 것은 4월혁명이었다. 민중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이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우리도 무엇을 해낼 수 있다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의 한국사 연구는 조선후기 민중의 사회적 성장이라는 사실을 중심 과제로 삼아 추구하였다. 즉 갑오농민전쟁으로 일단락되는 조선후기 민중의 사회정치적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실학의 역사관으로 대표되는 정신사적 이념의 정립이라는 양면을 실증적으로 추구하고 그 독자성을 모색하는 과제였다.
    그래서,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이미 농민군은 그들의 거사가 단순한 민란이 아니라 외세와 유착한 정권에 대한 반봉건 전쟁이며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적 전쟁이라는 의식을 드디어 확립하기에 이르렀다고, 그는 확신한다. 그리고 실학의 역사인식에 드러난 새로운 사유는 기본적으로, 세계 만방이 각기 민족과 영토와 문화를 갖춘 독자적 실재(實在)라고 하는 주체적 사관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그는 확신한다. 동시에 민(民)의 주체적 영위에 의하여 그러한 독자적 실재의 역사가 발전한다는 사관을 실학은 정립하기에도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런데 그의 역사학은 조선후기 미완으로 끝난 역사적 현실의 개혁 과제를 언제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역사관은 필연 현실의 민주화운동과도 결코 유리될 수가 없었다. 7, 80년대의 유신-군사정권 시절, 혹은 그 후의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언제나 있어야 할 만한 자리에는 꼭 있으면서 이 세상의 변천에 참여하였다. 그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끝없는 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헌신적인 민주 인사들에게는 마음속 책무감 또한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간행사 中)

    이 책은 정창렬 선생의 연구 가운데 갑오농민전쟁(이하 농민전쟁)에 관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발표된 것들이다. 물론 농민전쟁에 관한 선생의 모든 글이 이 책에 실린 것은 아니다. 농민전쟁에 관한 선생의 연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연구는 1975년 중앙대학교에서 발간된 <한국문화사신론>에 실린 「한국민중운동사」가 처음일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왕성하게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현상과 인식> 5-4, 1981), 「한말 변혁운동의 정치·경제적 성격」(<한국민족주의론Ⅰ>, 창작과비평사, 1982), 「동학교문과 전봉준의 관계」(1982), 「고부민란의 연구」 상·하(<한국사연구> 48·49, 1985)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선생은 한국사학계에서 농민전쟁 연구를 대표하는 연구자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것은 한국학계의 대표적 입문서인 <한국사연구입문>(1981), <한국사연구입문>(제2판)(1987), <한국학연구입문>(1981) 등에서 농민전쟁 관련 부분을 선생이 집필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 이후 2000년대까지 꾸준히 제출한 연구성과를 통해 선생이 밝혀낸 중요한 사실관계, 그리고 연구에 임하는 핵심적 문제의식 등은 농민전쟁 연구에 관한 한국학계의 수준을 진전시켜나가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선후기사부터 시작하여 근대사로 확장해 간 선생의 연구는 내용면에서는 물론이고, 다루는 시기 면에서도 그 시야가 매우 넓다. (해제 中)

    [노동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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