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를 가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by 담쟁이 posted Feb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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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가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1. '자인공'을 연휴 동안 읽었다.

 

- 며칠전 게시판에 당원 한 분이 꼬뮨주의 학생운동의 문건이었다는 '자인공' 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 연휴 동안 읽어 보았다. '자인공'을 비판한 '이별'도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민주화된 상황에서도 90년대 학생운동이 저토록 치열하고 폭력적인 이유가 그 당시에도 궁금했었다. 결국 외면을 받고 급격히 위축되었으니 역사와 학생대중이 판단해 준 셈이다. 한총련 때문도 아니고, 통일운동에 치중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 때문이라면 좌파학생회가 자리잡았을 것이다. 학생회가 80년대에 그토록 정치적이면서도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 성취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소명을 다한 이상 변해야 하는데, 관성이 유지되었다. 변화된 상황에 적응을 못하니 역사가 판단을 할 밖에...

 

자인공에서 강조한 정치적 학생회를 통해서 세상을 바꾼 80년대 학번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청춘을 바쳐 교과서에 있는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정작 그들은 독재시대에 군사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머리 속의 민주주의는 성취했지만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지체되었다. 90년대 학번이라고 다를까?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자인공'을 읽으면서 확인했다. ‘자인공이란 문건이 92년에 작성되었다고 하니, 김영삼이 당선될 무렵이다. 민주화가 완전히 정착될지 여부가 유동적이었던 시대였으니 80년대의 분위기와 닮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게 90년대 말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은 안타깝다.

 

- 그러나 '전위조직에 대한 충성'이라는 표현과 그걸 당연시하는 분위기는 놀라웠다. 전위의 지도가 항상 옳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하다. 소위 수령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관에 의하면 사회정치적 생명의 정수는 수령이고, 수령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받으니 수령을 어버이라고 부른다. 결국 사회정치적 생명을 받은 인민은 수령의 아바타에 불과한 셈이니, 그 사회에서 주체는 오직 수령 하나 뿐이다. 주체의 의식성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의 실체가 이렇다. ‘자인공에서 좌파의 다른 학생운동조직을 비판하면서도,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전대협을 본받으라고 다그치며 내심 부러워하는 것은 연유가 있는 것 같다. 서로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한쪽은 봉건왕조이고, 다른 한쪽은 독재와 싸우다 스스로 독재를 닮은 괴물이였으니 서로 닮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언더라는 조직형태는 군사독재시절에 탄압을 피하고, 조직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수공업적인 조직방식이다. 군사독재의 가혹한 탄압을 받던 운동의 초창기에 비합법적인 틀 속에 자신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소규모 써클 수준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민주적 결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화가 되어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자인공에서 정파의 폐해를 지적했지만, 스스로의 언명이야 무어라고 하든 내가 보기에는 정파에 불과했고 써클의 틀을 유지했다. 민주화되고 공개적이며 대중적인 공간에 진출했을 때는 붕괴를 면치 못한다. 이는 학생운동의 역사가 증명해준 바이다. 알바노조에 언더가 있었다고 하던데, 왜 그랬는지 정말 의문이다. 80년대의 엄혹한 시절도 아니고, 공개적인 대중단체에서 왜 그런 써클 방식이 필요한지 이해하기 힘들다.


 

2. 전위의 지도는 항상 옳을까?

 

- 자본주의 세상에 산다는 것은, 거꾸로 흐르는 물길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과 같다. 한시라도 방심하면 휩쓸려서 떠내려간다. 우리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세례 속에서 몸을 담고 살아간다. 상품사회를 바꾸자는 우리의 캠페인조차도 상품광고를 차용하고, 적극적으로 모방한다. 그람시에 의하면,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물리적인 지배에 포박될 뿐 아니라, 부르부아 이데올로기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에 이 체제가 유지된다고 한다.

 

지배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의 관점과 인식을 보여주는 게(, 대항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게) 소위 지도일 것이다. 배제된 자들의 일상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그 투쟁의 본질적 속성을 폭로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줄 아는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 지도일 것이다.

 

- 그것이 말하자면 전위의 지도일 터인데, 문제는 이게 윗선 또는 조직이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지배이데올로기에 노출되어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동의하듯이,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불완전한 존재가 어찌 늘 지도할 수 있을까? 자신이 깨달았을 때는 타인을 도와 함께 자각하는 것이고, 남이 깨달았을 때는 그에게 배우는 것이다. 스스로 공부하여 깨닫고, 서로가 비판 속에서 깨닫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윗선을 통한 지도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훌륭한 수령만 모시면 만사해결 끝이다. 그러나, 그 훌륭한 수령을 모시고 있는 주사파들의 행태는 과연 그러한가?

 

만약 전위라는 것이 있다면, 생활터전 속에서 함께 호흡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해서 깨달은 바를 설명하고 생활 속에서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매 정치적 사안마다 계급적 역관계와 현실태를 정확히 해설해서 보여주고, 투쟁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도 전위이다. 그람시가 이야기한 유기적 지식인은 전자이고, 레닌이 이야기한 전위는 후자이다. 언더가 전위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스스로 선포한 자가 전위인 것이 아니다. 역류 속에서 어찌 혼자만 버틸 수 있을까? 어깨 걸고 함께 역류에 맞서는 자가 전위이다.

 

- 나는 노동당이 그런 존재이기를 원한다. 시대상황에 따라 언더가 불가피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고,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해야 한다. 다만, 노동당이 그런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혁명의 시대가 가고, 변혁의지가 증발된 시대지만 노동당은 그런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자인공의 그 투지와 열정만큼은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노동당이 가장 그런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진보신당에서 한 번, 그리고 노동당에서 또 한 번, 두 차례의 큰 역류에 떠내려간 사람들과 싸우면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미미하지만,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틀 속에서 함께 어깨 걸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힘은 없지만, 그래서 인적 물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누군가 무엇을 한다면 도움은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는 들어주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3. 우리는 모두 아픈 존재들이다.

 

- 우리는 모두 아픈 존재들이다. 배제되어서 아프다. 그래서 이 운동을 한다. 전봉준이 그랬을 것이다. 역류를 잘 타지 못해서 배제되었을 것이고, 역류에 차마 떠내려 갈 수 없어서 아팠을 것이다. 비루한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정신세계, 그래서 세상과 더 화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잘난 사람들처럼 성숙하지 못한 인격일 수도 있다. 좋은 가정환경과 심리적으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훌륭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까칠하며, 자기 말만 주장하는 고집불통이고, 표방하는 거창한 말과 달리 행동은 거칠기 짝이 없을 수도 있다. 성격도 이상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을 것이고, 아부할 줄도 모르며 다른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들 줄도 잘 몰랐을 것이다.

 

- 배제되어서 아프고, 성숙하지 못해서 아프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또 우리는 서로의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고 아프다. 아픈 존재들답게 거칠고 미성숙한 태도로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당 게시판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공동체의 관계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비판 속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과정의 문제라고 한다. 우리의 관계는 정체된 것이 아니며, 완성된 것도 아니고, 애정 어린 비판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 당 게시판을 통한 거센 비판도 그래서 의미 있다고 본다.

 

-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우리는 부유하는 존재이다. 우리 당원 대부분은 사회운동의 파견자도 아니고, 검증받은 자들도 아니다. 스스로 자임하여 당원이 된 자일뿐이다. 또한 쁘띠부르주아의 계급적 한계 속에 있다. 신분은 노동자이지만, 의식은 쁘띠부르주아에 불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 당원 대부분이 노동자이지만, 자기의 노동을 전체 사회의 계급 역관계 속에서 해석할 줄도 모르고, 나아가서 운동으로 건설할 줄도 모른다. 다만, 다른 누군가의 운동에 연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자기의 노동을 전체 사회의 계급 역관계 속에서 해석할 줄도 모르니, 어떻게 남의 투쟁을 해석하고 설명해 줄 것인가? 그저 연대할 뿐이다. 연대라도 하니 그나마 역류에 떠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부유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다행히 공통의 목적을 가진 동지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당이라는 조직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성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다. 함께 어깨를 걸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당이라는 형태로 묶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늘 현실에 개입하고자 연대하기 때문에, 비판 속에서 스스로 돌아보기 때문에, 그나마 역류에 떠내려가는 것은 면하고 있다.

 

 

4. 우리의 어려움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 최근 우리는 강령을 개정하여 사회운동정당을 표방하였다. 강력한 사회운동만이 사회변혁의 조건을 창출한다. 따라서 일단 현재의 침체된 사회운동을 건설하고 그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야만, 우리 당이 처한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정당을 표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선 인민 속에, 각 계급 속에서 뿌리박고 신뢰를 얻는 활동가로서 거듭나야 한다. 각 계급간의 역관계에 대한 살아 있는 깨달음을 공유하자면, 우리는 우선 모든 계급의 주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은 생활인이다.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자신과 동료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지 파악하고, 동료와 함께 삶의 문제를 가지고 투쟁을 건설하고, 대항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우선 나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른 누구를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동에 내재되어 있는 계급적 본질을 자각하고, 연구하고 발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굳건히 사회운동에 뿌리박아야 한다. 사회운동에 뿌리를 박고, 그 현실의 실천 속에서 늘 검증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운동의 성공은 물론,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조차 막지 못할 것이다.

 

- 80년대의 혁명적 열정이 사라지고, 변혁의지가 증발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고집스럽게 사회주의를 붙들고 있고, 상품사회 이후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개량의 시대다. 기회주의와 개량주의의 유혹에 휩쓸리기 쉽다. 진보신당에서 노동당으로 이러지는 두 차례의 탈당흐름도 개량의 시대라는 틀 속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때는 버텼지만, 지금의 우리가 앞으로도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나, 허물이 있는 상대방을 공격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고, 악마사냥 하듯 매도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성숙됨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부족함을 비껴갈 수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런다고 당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의견도 듣지 않고 예단함으로써 조직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목표인가? 참주선동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방식인가?

 

피해자 입장에 서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피해자를 가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최근 당게시판을 보면 염려되는 모습이 보인다. 발전을 위한 비판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파괴에 몰두하며, 심지어 몇 몇은 청산주의적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당을 깨거나 흔들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되, 한 발 정도 거리를 두어서 건설자의 입장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대표단 사퇴를 성급하게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는 볼 것도 없다는 예단은 무리한 주장이다. 섣불리 당을 깨자는 말도 하지 말자.

 

앞에서 나는 자인공의 그 투지와 정열에 대해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회당과 합당할 때, 그리고 그들에게 투표를 하며 당대표를 맡겼을 때, 우리는 그들의 투지와 열정을 높이 사고 그걸 기대하지 않았나? 탈당한 선수들을 대신 하라고 맡기고 관망한 것은 아닌가? 앞장서서 분투하는 자들을 상대로 진보정당 운동의 전성기를 경험한 덕에 안목은 제법 높은 분들이 점잖게 한 마디 한다. 세련되지 못하고 후지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래, 말은 맞으니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뒤로 물러나 꼼짝도 안한 책임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는 소리는 왜 안 나오는 걸까? 풍찬노숙에 기초체력이 방진되어 애늙은이가 다된 그런 사람들의 책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힘들게 버티고 있는 많은 당원들의 자존심에 모욕감을 주지 말자. 함께 어깨를 걸고 거센 역류를 헤치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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