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_ 세계화 시대에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작성자
홍조 정
작성일
2021-09-30 23:46
조회
746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_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 정해영 옮김 | 메멘토 | 2016년 04월 18일 출간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경제/경영 > 세무/회계 > 회계일반

경제/경영 > 각국경제 > 세계경제사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역사학자이자 맥아더 ‘지니어스’ 상 수상자인 제이컵 솔(Jacob Soll)은 수천 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서 회계가 어떻게 왕국과 제국과 전체 문명을 형성해왔는지를 연구해왔다. 이 책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는 회계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제이컵 솔의 혁신적인 시선을 만나 볼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촘촘하게 엮어내는 역사 이야기 속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과 사건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그들이 회계의 역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책은 주요하게는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700여 년에 걸친 회계의 역사와 정치적, 재무적 책임성의 역사를 함께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재무적 책임성을 달성하기가 왜 그토록 어려운지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더불어 회계를 단순히 재정 거래의 일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 문화적 체계의 일부로 바라볼 때 재무적 책임성이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회계와 책임성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은 한 기업, 그리고 실제로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따라서 재무는 단지 수치로 나타난 순환적 위기나 경향만을 다루지 않는다. 중세 이탈리아 회계가 준 기본적인 교훈은 부와 정치적 안정성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믿기 힘들 만큼 어렵고 취약하고 아주 위험하기까지 한 존재이다. 놀랍게도 그 교훈은 7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저자소개

저자 : 제이컵 솔


역자 : 정해영


목차


서문_ 루이 16세는 왜 단두대로 보내졌는가

제1장_ 회계장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제2장_ 중세 상인들의 딜레마, 신이냐 이익이냐

제3장_ 한 시대를 풍미한 메디치가(家), 신플라톤주의에 패하다

제4장_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제5장_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만든 복식부기

제6장_ 루이 14세가 휴대한 회계장부와 프랑스 절대왕정

제7장_ 18세기 영국 재상 월폴이 탄생시킨 구제 금융과 정치 비자금

제8장_ 웨지우드의 회계 혁신이 가져온 부와 명예

제9장_ 프랑스 절대왕정을 벌거벗긴 재무총감, 네케르

제10장_ 회계 원리를 토대로 미국을 건국한 사람들

제11장_ 철도와 공인회계사의 탄생

제12장_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회계의 이중성

제13장_ 대공황과 리먼 쇼크는 왜 막을 수 없었는가

결론_ 책임성을 이루기 위해 싸워온 역사


참고문헌

부록: 한국 전통 회계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전성호)

찾아보기



책 속으로


“성공적인 사회는 회계와 상거래 문화가 풍부한 사회일 뿐 아니라, 회계를 무시하고 날조하고 등한시하는 인간의 습성에 대처하기 위해 견고한 도덕적, 문화적 틀을 구축하는 데 노력해온 사회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왜 이처럼 간단한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를 짚어본다.” -13쪽


“복식부기 회계가 없었다면 근대 자본주의도 근대 국가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식부기 회계는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필수적인 도구이며, 재무 관리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복식부기는 1300년 무렵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때까지 고대와 중세 사회는 복식부기 없이 유지되었다. 실제로 복식부기 회계의 도래는 근대 정치와 자본주의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17쪽


“이 책은 회계를 단순히 재정 거래의 일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문화적 체계의 일부로 바라볼 때 재무적 책임성이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중세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회계와 재무적 책임성과 신뢰의 장기적인 전통을 이용하는 데 성공한 사회들은 완전한 문화적 포용을 통해 그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피렌체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공화정과 황금기의 네덜란드, 18~19세기의 영국과 미국은 모두 회계를 교육 과정과 종교·도덕 사상, 예술, 철학, 정치 이론에 통합시켰다.” -19쪽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실용적인 수학과 고매하고 인본적인 사고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회들은 회계의 이용을 극대화했을 뿐 아니라 복잡한 책임성의 문화와 그러한 문화를 구축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성의 문화와 함께, 자본주의와 대의정부가 등장했다.” -20쪽


“메디치가와 그들의 불운한 회계사 사세티의 이야기는 피렌체의 부기처럼 오래되고 뿌리 깊은 전통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당대의 위대한 은행가였던 코시모는 플라톤 철학에 매혹된 일이 수백 년간 회계와 책임성 문화를 침식시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실제로 회계는 그의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였다.”

-99~100쪽


“펠리페 2세의 역사적인 회계 개혁은 카스티야의 뜨거운 흙먼지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 역사에서 잊혔다. 그러나 훈련된 행정가도 없이, 회계에 대한 편견에 맞서 개혁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펠리페 2세의 개혁 실패는 그저 한 번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넘어, 아무리 강력한 왕이라도 정치적 책임성을 가져올 수 있는 재무 개혁을 실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135쪽


“네덜란드인들이 회계 기술을 터득하고 대중화하고 국정 관리에 이용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복식회계의 엄격한 요구 사항에 힘겨워했고 재무적·정치적 책임성을 유지한다는 어려운 도전과 씨름해야 했다. 어쩌면 네덜란드 황금기가 가르쳐준 교훈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책임성을 원하는 이들은 회계를 배우고 회계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네덜란드의 이야기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책임성 있는 정부와 재무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139~140


“프랑스 정부의 끝없는 실패는 비밀스럽고 어리석은 국왕의 명령과 끔찍한 재정 관리에서 기인했을 뿐 아니라, 국가 기구를 분열시킨 루이 14세의 정책에서도 기인한다. 국가의 회계 능력은 제한되고 몇몇 대신과 그 가족의 손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모든 가능성과 재능과 힘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프랑스가 정체되고 몰락하기 시작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할 무렵, 프랑스는 효과적인 회계 시스템 없이 파산한 상태였다. 이제 75년간의 재정 위기와 엄청난 심판이 프랑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188~189쪽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근대 회계 법인들은 기껏해야 공평무사한 심판관이나 숙련된 재무 분석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악덕 기업과 무책임한 정치인들을 제대로 폭로하지 못했으며, 최악의 경우 분식회계를 위한 숙련된 조력자 노릇까지 했다. 현대 재무가 한층 복잡해짐에 따라, 개혁과 재무적 책임성을 향해 한 발 한 발 위태롭게 나아가는 것이 점점 더 힘겨워졌고, 회계사의 역할은 더 약해지고 모호해지기까지 했다.”

-345쪽


출판사 서평


권력과 문명의 흥망성쇠에서

회계의 역할을 밝혀낸 정치경제사 분야의 걸작

1999년 공중 분해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회계장부를 실제와 다르게 꾸미는 것) 규모는 41조 원에 달한다. 2001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의 엔론과 2002년 월드컴의 분식회계 규모는 약 12조 원으로 대우그룹 앞에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데 엔론 최고경영자가 24년형, 월드컴 최고경영자가 25년형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에서 분식회계 장본인이 제대로 처벌받은 적은 없다. 그래서인가. 대우그룹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되어가지만 한국에서는 매년 대규모 분식회계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도로를 건설하건 전쟁을 하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들은 국가의 자산을 추적하고 정치를 관리하기 위해 회계에 의존해왔다. 감사와 복식부기 같은 기본적 회계도구는 근대 자본주의와 국가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회계가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왔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미천하며, 우리는 여전히 위험할 만큼 회계에 대해 무지하다. 회계는 책임을 묻고 평가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오용하면 사기의 도구로 전락한다. 2008년 금융위기는 부실하거나 위험한 회계가 사회 전체를 어떻게 송두리째 붕괴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예다.

역사학자이자 맥아더 ‘지니어스’ 상 수상자인 제이컵 솔(Jacob Soll)은 수천 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서 회계가 어떻게 왕국과 제국과 전체 문명을 형성해왔는지를 연구해왔다. 그에 따르면, 15세기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복식부기를 통해 은행업에서 성공해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회계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피렌체 공화정 자체의 경제적 쇠퇴에 일조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정확한 부기가 지출을 제약하여 자신들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정직한 회계를 피했다. 실제로 루이 16세의 재무총감 네케르가 1781년 왕실의 장부를 공개했을 때 대중은 폭발했고,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당겼다. 19세기에 투명한 회계가 마침내 뿌리를 내렸을 때, 그것은 영국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무능함 때문이건 혹은 의도적이건 1929년의 대공황과 2008년의 금융위기가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회계는 계속 오용되어왔다.

회계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제이컵 솔의 시선은 혁신적이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능력은 탁월하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촘촘하게 엮어내는 역사 이야기 속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과 사건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그들이 회계의 역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펼쳐진다. 최근 역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이 책은, 점점 더 투명해지고 상호 연결된 이 세상에서 어째서 책임성 있는 회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수적인지를 보여주는 정치경제사 분야의 걸작이다.


재무적, 정치적 책임성은 왜 그토록 이루기 어려운가:

700년에 걸친 재무 책임성의 역사를 살펴본 최초의 책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는 개인적인 회계 기록을 바탕으로 『업적록』을 썼고, 로마는 각 가정의 가장에게 가계부를 기록하도록 했으며, 이 가계부를 세리들이 감사하게 할 정도로 회계가 번성했다. 그러나 국가 회계는 일관성이 없었고, 기만행위가 만연했다. 키케로는 부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부실한 회계장부를 기록했고, 그럼으로써 카이사르에게서 훔친 ‘수없이 많은 돈을 탕진하고’ 심지어 회계장부와 서명까지 날조했다고 주장했다. 키케로가 비난한 것은 부실 장부였는데도 원한을 품은 안토니우스는 키케로가 죽은 후 그의 시체에서 머리와 손을 잘라 광장에 전시했다. 로마의 역사는 적어도 회계에 관한 한 시공을 초월해 반복된다. 투명한 회계를 이루기는 어려운 반면, 회계 부정에 대한 유혹은 강하고 끈질기며 권력자들은 장부 공개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1300년 무렵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진 복식부기는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필수적인 도구이자 재무 관리의 근간이다. 그러나 회계는 행정부를 심판하고 책임을 묻는 데 필요한 ‘대차 균형’이라는 개념도 가져왔다. 성공적인 초기 자본주의 사회들은 회계 시스템과 그에 상응하는 재무적, 정치적 책임성 시스템을 개발했다. 회계는 정치적 정당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져왔는데, 대차 균형이 이뤄졌다는 것은 사업을 잘했을 뿐 아니라 통치를 잘했음을 뜻했다.

이 책은 주요하게는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700여 년에 걸친 회계의 역사와 정치적, 재무적 책임성의 역사를 함께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재무적 책임성을 달성하기가 왜 그토록 어려운지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1340년 제노바 공화정은 중앙정부 관청에 대형 등록부를 두고 도시국가 제노바의 재정을 복식부기로 기록했다. 피렌체의 경우, 1427년 법에 따라 피렌체의 토지 소유자나 상인은 복식장부를 기록해서 카타스토(catasto)라고 하는 정부의 세금 감사를 받아야 했다. 16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 도시공화정이 쇠락하고 거대한 절대군주제가 등장하자 회계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졌다. 당시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복식부기 회계는 사라졌다.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펠리페 2세,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회계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 어느 왕도 14세기 제노바를 비롯한 북이탈리아 공화정만큼 안정적이고 중앙집중적인 복식회계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 선거제 정부가 등장한 19세기 영국에서도 부패와 무책임이 만연했다. 재무 책임성 메커니즘을 설계한 초기 미국도 도금 시대에 악덕 자본가, 대규모 분식회계, 재정 스캔들과 재정 위기에 빠졌다. 재무 책임성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달성하기 힘들다. 이는 기업 차원에서건 정부 차원에서건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가 번영하고, 어떤 사회가 몰락하는가:

실용적 수학과 시민적 인문주의가 만났을 때 사회는 번영한다


어떤 사회는 번영하고, 어떤 사회는 몰락하는가? 저자 제이컵 솔은 상업 지식에 대한 존중이 있고, 실용적인 수학이 인문주의와 결합한 국가와 사회는 번영하고 부를 누린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피렌체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공화정과 황금기의 네덜란드, 18~19세기의 영국과 미국은 모두 회계를 교육 과정과 종교·도덕 사상, 예술, 철학, 정치 이론에 통합시킨 예로 보았다.

15세기 피렌체는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인 동시에 유럽 교육의 중심지였다. 주도(州都)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주는 식자율이 높았는데, 읽고 쓰는 행위의 상당 부분이 상업 기록과 관련되었다. 거주자 12만 명 중에 8천에서 1만 명 정도가 학교에 다녔고, 그 학교 절반이 주산 학교였다. 은행가, 상인, 장인, 변호사 들은 자기 직종에 대해 배우는 한편,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같은 고대 학자들의 가르침도 배웠다.

책으로 출간된 최초의 회계 편람, 복식회계의 교과서로 불리는 『산술, 기하, 비율 및 비례 총론(Su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1494년)을 쓴 도미니크회 수사이자 인문주의자이자 수학자였던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 1445~1517년)는 「계산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재무의 기초 원리를 명시하고, 왜 그것이 공화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지를 설명한다. 파치올리는 고전적 인문주의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복식부기를 지식의 필수 형태로 평가하던 세계에서 살았고, 회계가 시민적 인문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 제국에 세금을 지불하기 위해 불어와 복식회계를 배웠지만, 절대군주국에 반대하고 상업 공화정에 공감했다. 네덜란드 경제가 성장하면서 안트베르펀에 회계 학교가 많이 생겼다. 효과적인 지방세 징수 시스템이 있었고 조세 수입은 복식부기로 기록되었다. 17세기 중반에 암스테르담은행 설립되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주식 거래의 본고장이 된다. 사회의 모든 차원으로 비즈니스가 확산됨에 따라 복식회계는 꼭 필요한 지식이라는 일반적인 합의가 형성되었다. 복식회계를 정치 행정에 이용한 최초의 군주, 마우리츠 공, 형이상학적 학문과 상업적 기술을 접목한 네덜란드 최고의 인문주의자인 시몬 스테빈은 책임성이 결여된 관리가 정부를 실패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 라이프니츠와 미적분을 개발한 암스테르담 시장인 후더, 자유시장 공화주의 이론가인 피터 드 라쿠르, 드 라쿠르와 더불어 공화주의 윤리와 수학을 좋은 통치의 도구로 바라본 네덜란드 엘리트 통치자 얀 더 빗은 정치와 경제 정책을 효과적으로 개발하려면 정치 이론과 윤리학, 역사학, 수학, 회계학, 상업과 무역에 관한 전문 지식에 능통해야 한다고 믿었다.

18~19세기 영국에는 회계를 상업적 관리의 도구일 뿐 아니라 정치적 사유의 도구로 본 베이컨과 홉스가 있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논리적 이성의 탄생 자체를 회계 또는 계산의 공으로 돌렸다. 홉스는 덧셈과 뺄셈 없이는 정치를 할 때 과연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회계와 윤리학, 철학을 그토록 단호하게 연관지은 적이 없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이 팽창하면서 회계 전문성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상업을 존중하는 점잖은 지배 계급도 회계를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19세기 이메리카의 엘리트와 도시 계급은 영국 재무 혁명의 세계에서 왔고, 초기 청교도 상인들은 부기에 능통했다. 도시에서는 영국 못지않게 회계 문화가 꽃을 피웠다. 1700년대 초반에는 영국 스타일의 ‘글쓰기 학교’가 대부분의 대도시에 등장하여 ‘상업 회계’를 가르쳤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조지 워싱턴 같은 미국의 건국자들은 자신들의 삶과 가치 체계에 관련된 온갖 사소한 것들까지 회계 기록으로 남겼다. 회계와 국제 무역에 대한 전문성과 철학적 관심을 겸비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독립전쟁 이후 재무부를 운영하고 미국을 단순한 식민지 집단에서 중앙은행과 조폐국, 건전하게 조성된 공채까지 갖춘 어엿한 국가로 변모시킨 연방 재무 계획을 수립한다.


메디치가(家), 스페인 제국과 프랑스는 왜 몰락했는가


제이컵 솔은 파치올리의 복식회계 교과서가 널리 확산되지 못한 데에는 시민적이고 상업적인 인문주의가 귀족적 이상과 무력, 나아가 제국주의에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재무적 책임성은 정치적 책임성과 연관된다. 따라서 재무 책임성이 위기라면 정치적 책임성마저 위기에 빠진다.

은행을 국제적인 강자(强者)로 만들며 유럽을 통틀어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년)는 고전 문예부흥(르네상스)의 주요 옹호자이자 후원자로서 르네상스를 개념화하고 후원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영광은 효과적인 부기라는 일상적인 토대 위에서 탄생한 셈이다. 그러나 코시모는 아들이 자신처럼 세속적인 중세 비즈니스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는 르네상스 피렌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인 ‘위대한’ 로렌초(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가 형편없는 회계 실력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은행의 수장이었던 로렌초는 은행을 운영할 기술도, 의지도 없었다. 그는 피렌체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짓밟고 도시 재정을 바닥내고 그 돈으로 가족을 위해 교황의 권력을 샀다. 한때 피렌체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메디치가는 로렌초의 통치하에서 피렌체의 재정적 안정성과 공화주의적 자유를 차츰 무너뜨렸다. 메디치가의 몰락에는 역설적이게도 상업 지식에 대한 경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붉은색 모로코 가죽 겉표지에 제목은 금박으로 썼으며 두 개의 황금 걸쇠로 고정된 휴대용 회계 장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회계에 관심을 보인 최초의 전제군주였던 루이 14세는 재정 문제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재무총감 콜베르가 죽은 후에 콜베르가 정부 안에서 맡았던 지위와 그것을 뒷받침했던 정보 보고 체계를 폐기한다. 콜베르의 제도가 깨지자 프랑스에서는 철저한 감사도 중앙집중적 회계도 불가능해진다. 루이 16세 시대에 오면 상황은 더 심각해져, 프랑스는 3퍼센트의 귀족이 90퍼센트의 부를 차지하는 지경에 이른다. 부채와 인플레이션, 금리를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의 오만한 귀족 계급 대지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100여 년 동안 프랑스 엘리트들은 자신들에게 5퍼센트 이상의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 또는 결과적으로 세금 부과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개혁에 저항했다. 루이 16세의 재무총감 네케르가 왕실 재무 보고서를 공개하자 대중들은 폭발했고,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이탈리아, 남아메리카, 벨기에, 네덜란드를 통치했다. 제국은 상상할 수 없는 부의 원천이었지만 전 세계에 산재한 식민지를 유지하는 비용이 더 컸다. 따라서 제국의 재무 행정을 위해 유능한 회계사, 재무 관리자가 필요했지만 귀족적 윤리관을 가진 카를 5세는 장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지도 않았다. 1556년 그가 퇴위할 무렵, 제국은 총 수입의 68퍼센트를 외국 은행가들에게 받은 대출을 갚는 데 썼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관리하는 집착에 가까운 습성을 가져서 ‘서류왕’이라 불렸지만 제국의 장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국가 회계장부를 관리하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과업을 다른 누군가의 손에 맡겼다. 개혁 관료 오반도와 토레그로사가 필수 행정도구로 중앙집중적 회계를 제안했지만 개혁을 완료하기 전에 무적함대 원정에 들어가 개혁은 실패한다. 펠리페 2세와 토레그로사의 죽음 이후 스페인은 더욱 큰 재정 위기에 빠졌고 파산을 선언한다.


상업 지식은 언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을까


고전적 인문주의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복식부기를 지식의 필수 형태로 여기던 세계가 있던 반면, 중세 시대 은행가와 상인은 죄책감에 짓눌려 살았다. 대부분의 금융업은 교회법에 위배되었다. 그중 대부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회계에 관한 이중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재산을 정직하게 처리하라고 하는 반면, 재산이 세속적이며 죄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운동인 신플라톤주의는 예술적·문화적·정치적 성취를 토대로 하는 인간의 영광을 이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종종 불쾌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질적 비즈니스의 문제들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상업 지식을 경멸했을 때, 그가 이끄는 귀족적 인문주의 학파는 유럽의 엘리트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출판된 지 300년 동안 읽히면서 서양문학에서 결정적인 작품이 된 카스틸리오네의 『조신(Cortegiano)』(1528년)은 이상적인 귀족을 복잡한 재무 문제에 손대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예수회의 창립자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 거장들의 인문주의 교육에서 회계는 빠져 있었다. 스콜라주의 사상가들은 금전 대출을 비난했다. 기사도 정신과 신플라톤주의의 세례를 받은 군주에 의해 통치된 16세기 전제군주 시대에 회계 자체는 저속한 상업적 기술로 멸시를 받았다. “귀족들은 싸움도 하고, 기도도 하고, 호화롭게 살기도 하고, 사업도 했다. 그러나 돈을 세는 일만은 결코 하지 않았다.”(* 118쪽)

이어 돈을 세고 계산을 하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불편함을 드러내는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캥탱 마시의 〈대금업자와 그의 아내〉(1514년)에서 대금업자의 아내는 기도서의 한 페이지를 붙잡고 있다. 종교적이고 경건한 장면과 르네상스 시대 사무실 풍경에 대한 묘사한 이 그림은 돈을 취급하는 일을 경건함과 연결했다. 반면 판 레이메르스바얼러가 그린 〈환전상과 그의 아내〉(1539년)는 순수하게 상업적이며 물질적 욕망만을 보여줄 뿐 기도서가 없다. 최초의 반(反)회계 이미지인 레이메르스바얼러의 〈두 징세 청부인〉(1540년)은 대금업자의 탐욕스러움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공식 징세 청부인과 세금, 회계라는 저속한 수단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을 드러내고 있다.


회계의 두 얼굴:

사기의 도구인가 근대적 이성인가


상업 공화정이 가장 발달한 시기에도 거의 모든 상인은 두 세트의 장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자기들만 볼 수 있는 ‘비밀 장부(libro segreto)’, 다른 하나는 정부 감사를 받기 위해 그럴듯하게 꾸민 공식 장부였다. 14세기 이탈리아 공화정의 전성기에 활동한 토스카나의 거상(巨商) 다티니, 15세기 유럽 최고의 부자였던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도 비밀 장부를 가지고 있었다. 책임성 시스템이 잘 갖춰진 시대에도 회계부정을 저지르는 일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 책이 서술하듯 회계는 권력과 억압의 도구로서 이용될 수도 있다. 루이 14세의 재무총감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자신의 정적인 니콜라 푸케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모든 문서와 회계장부를 압수하여 그에게 반역 혐의를 씌운다. 이는 회계장부를 정치적 무기로 이용한 실례다. 루이 16세의 재무총감 네케르는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에서 약 5,000만 리브르의 군사 및 부채 관련 지출을 ‘특별 지출’로 간주하고 누락하여, 1,020만 리브르의 예산 흑자를 주장했다. 이때부터 축소 보고의 전통, 또는 국익을 위해 군사 지출을 장부에서 배제하는 오랜 전통이 시작된다. 18세기 영국 재상 월폴은 사우스시컴퍼니 거품과 영국 신용시장을 위해 정부 구제 금융을 고안해냈다. 사우스시컴퍼니는 규모가 워낙 커서 파산하면 그 여파가 엄청날 것이 확실하기에 그냥 둘 수 없는, 요샛말로 표현하면 ‘대마불사(大馬不死)’였다. 그러나 파산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회계가 복잡해지면서 사기의 가능성도 복잡해졌다. 미국에서는 그런 양상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철도 산업이 발달하면서 미국의 재무 회계는 복잡해지고 부패가 만연해졌다. 또 산업혁명 후반부까지 수치로 표현되는 재정적 성공이 인권보다 중시되었다. 그 때문에 ‘과학적 관리법’으로 유명한 테일러주의는 레닌, 스탈린, 히틀러의 관심을 받았다. 전후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미국에서 회계는 황금기를 맞이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는 회계감사 법인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회계 법인들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감사를 수행해야 할 똑같은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컨설팅 계약을 수주함에 따라 독립성의 기준선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회계 법인은 거래 기업을 위해 거짓 재무제표를 작성했고, 거대 회계 스캔들이 잇따라발생했다.

회계가 점점 전문화되고 복잡해질수록 책임성이라는 과업은 우리 손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규제자들과 감사관들조차 미로처럼 복잡한 숫자와 재무 대수, 초고속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와 부채담보부증권 같은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에 직면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아무도 2008년 금융위기를 막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저자는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교훈이 있다면, 회계를 문화의 일부분으로 활용하고 그것을 문화 안에 녹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372~373쪽)


한국 전통 회계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세계사 속 개성 상인의 복식부기 장부


이 책은 부록으로 「한국 전통 회계는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더해 개성 상인의 회계 기술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개성 상인의 회계는 1916년 현병주가 개성 사람인 김경식, 배준여 두 사람과 함께 편집한 『실용자수사개송도치부법(전)(實用自修四介松都治簿法)(全)』을 발간하면서 알려졌다. 현병주는 자신의 저서에서 개성 상인의 사개치부법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부기법보다 200년 먼저 발명되었고, 그 원리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개성 상인 복식부기 장부 가운데 2014년 2월 27일 한국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 제 587호로 등록한 문서는 개성 상인 박재도 가문이 보유했던 회계장부 14권과 다수의 문서 일괄이다. 집필자 전성호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1887년에서 1912년까지 25년 동안 발생했던 대략 30만 건의 거래 내역이 총 1,298쪽 분량으로 기재되어 있고, 일기장(분개장)에서 총계정원장,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그리고 이익배분처리서까지 완벽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모든 영업 활동을 복식부기 방식으로 기입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자료다.

이 밖에도 부록에는 한국 전통 회계의 흥미로운 특징들이 기술되어 있다. 몇 가지를 들어보자. 국가 재정에서 회계의 책임성과 관련된 규정들은 이두로 표기되었다. 예를 들어, 사실과 다른 것을 기록하는 회계 부정 관련 조항 ‘反作’에서, 反의 음은 ‘반’이 아닌 ‘번’이며 作의 음은 ‘작’이 아니라 ‘질’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회계 이론에서 금전 거래나 현물 거래에서 오고 가는 물건의 흐름을 사람의 행위로 비유하는 것을 ‘인격화(personification)’라고 한다. 한국 전통 회계에서는 영리조직과 비영리조직, 그리고 국가조직 회계 문서 모두 ‘질(秩)’이라는 용어를 통해 회계이론상 필요한 인격화를 나타내었다. 불교를 기반으로 상인들의 영리 추구를 위해 개발한 고려 시대의 송도사개치부법과 비교하여, 조선 시대 회계는 비영리회계, 특히 정부 회계 분야에서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영리조직이건 비영리조직이건 모두 이익보다 유동성 흐름, 곧 현금 흐름에 초점을 두고 장부를 작성했다는 특징도 있다.



[온라인 노동자 서점]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2124095



20대 청년여성들이 자살률이 한국이 유일하고 세계 최고라고 한다. 북조선식으로 가야 한다. 이 리론은 지리적인 경로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혁명경로에 대한 이론이다. 한국에서 청년층 자살이 사라지려면 미일을 거쳐서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거쳐서 북조선으로 가야한다. 우리의 혁명노선이다. 마찬가지로 노동대학에 가려면 일반 대학을 거쳐서 가야 한다. 여성은 군대와 현장으로 들어가라!! 청년은 전문대와 산업대에 지원하라!! 학생은 직업학교 무상교육을 요구하라!! 노동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노동자가 되어 공장을 가야한다!! 자살대신 경공업 공장을!! 자살대신 회계학원을!! 반실업자가 널려있다. 전국 곳곳에 경공업 사업체를!! <노정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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