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실리의 황금분할

작성자
서울특별시당
작성일
2021-10-14 16:39
조회
781


명분과 실리의 황금분할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나한테 말씀하셨어. “착한 사람은 손해 본다. 그래도 너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씀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어. 어린 마음이 편치 않았지. 두 질문이 뒤따랐어. “착하면 왜 손해 보나?”와 “손해를 보는데 왜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나?”라는 질문이었어.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손해를 보고 싶지도 않았지. 동네 동무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면서 얼마나 따려고 애썼는데! 딜레마에 처한 ‘착한’ 어린이가 궁리 끝에 해답을 찾아냈어. ‘까짓 거 손해 좀 보지 뭐! 손해를 보더라도 남는 게 있을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다만 손해를 보더라도 조금만 봐야 하는 거였어. 동무들의 구슬이나 딱지를 다 딴 뒤에 개평을 조금 떼어 주는 정도면 아주 괜찮지. 내 딴에는 명분과 실리를 황금분할하여 둘 다 차지하겠다는 셈법이었지. ‘착하게 산다’는 명분과, ‘손해를 조금만 보니까 남는 게 많은’ 실리 말이야. 그럴듯한 해법이잖아. 꿩도 먹고 알도 먹으니까. 

 당시 내가 이 해법을 찾아내고 마음이 편할 수 있었던 데 에는 학급에서 1등을 차지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어. 공 부를 꽤 잘했거든. 나름 자신이 있었던 거지. 손해를 조금만 보면 남는 게 꽤 많을 거라는 자신 말이야. 남에게 베풀기도 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장래의 내 모습을 그렸어. 근사한 욕망이었지.

 그로부터 반세기 넘는 세월이 지났어. 근사했던 욕망은 일찌감치 신기루처럼 사라졌어. 요즘에도 종종 외할아버지 의 말씀을 되짚어 보게 돼. “착하면 손해 본다.”는 말씀은 진리에 가까웠어. 그게 인간 본성의 문제인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인지, 내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살았으니 알 수 없는데, 아무튼 수긍해야 했어. 그렇다고 “난 손해 보기 싫어! 그래서 착하게 살지 않을 거야!”라는 의지를 갖는다고 한들 그게 실 현 가능한 일일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걸까? 아닐 거야. 

 삼 형제의 막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얘기가 있어. 큰형 은 무척 착한데 작은형은 성질이 아주 고약해. 어느 날 막내는 착한 큰형한테는 무심하게 대하는 반면에 고약한 작은형한테는 계속 신경 쓰면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 반대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거야. 큰형은 착한 게 당연하여 계속 착해야 해. 조금만 달리 대해도 서운한 감정이 들어. 반면에 작은형은 평소보다 조금만 덜 고약하게 굴어도 감복해하는 거야. 큰형의 착함과 작은형의 고약함을 ‘디폴트(초기 설정값)’로 설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쨌거나 실상은 이런 게 아닐까. 고약했던 사람이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기 어렵듯이,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게 억울하다고 고약한 사람이 되기도 어렵다는 것 말이야. 사람의 성품을 자유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선 확신할 수 없어. 다만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소홀히 대하지 않도록 성찰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을 뿐이야.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 되새기면서 말이야. 

 명분과 실리의 황금분할에 관한 얘기를 한다고 해 놓고 다른 데로 흘러갔네. 언젠가부터 이 땅은 명분과 실리를 함께 차지할 줄 아는, 다시 말해 황금분할을 잘하는 능력자들의 세상이 됐어. 내가 소싯적에 바랐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 된 거야. 그런 세상이 왔는데 정작 나는 그런 사람들 축에 끼지 못했어. 명분도 실리도 보잘것없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실리를 챙기지 못했으니 명분도 보잘것없는 거야. 그래서 ‘소박한’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됐을 거야. 핑계를 대자면, “돈이 없으면 가오라도 있어야지!”라는 말의 시효가 지난 지 꽤 오래됐다는 거야. “부자 되세요! 마음의 부자 같은 거 말고 그냥 부자 되세요!”의 세상이야.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어. 가령 자식으로 하여금 또래들한테서 “임대충(임대아파트에 사는 벌레)”, “이백충(월 소득을 200만원 밖에 못 버는 벌레)” 소리를 듣게 하는 ‘자발적 가난’을 가오로 내세울 수는 도저히 없는 거잖아.

 

 실제로, 실리가 없으면 명분도 없는 세상이 되었어.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치고 자산가가 아닌 사람을 찾기 어렵더라 고. 정치인들 중에 노회찬 전 의원은 예외적인 경우였어. 국 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웬만한 인물들 은 모두 수십억 자산가들이야. 그들이 명분을 잘 세워서 실 리를 챙긴 건지, 실리를 잘 챙겨서 명분도 따라붙은 건지 알 수 없는데, 그들이 황금분할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자라는 점 은 분명한 사실이야. 그들보다 가난한 서민, 노동자들이 계속 그들을 찍어 주잖아. 자기들처럼 가난한 진보는 실리를 챙기지 못한 만큼 능력자가 아니므로 명분도 상실한 거야. “진보=실리 없음=무능력=명분도 없음”의 등식이 관철되는 거지. 

 바야흐로 실리와 명분을 짱짱히 챙길 줄 아는 능력자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거야. 그들을 기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그건 능력 없는 자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어쩌겠어. 어차피 ‘이생망’이니,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말에 위안을 얻는 수밖에. 

“사려 깊고 헌신적인 작은 시민 그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유일 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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