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박애주의자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작성자
홍조 정
작성일
2022-01-20 23:09
조회
574

부르주아 박애주의자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V. I. 레닌 1915년 5월

영국의 백만장자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전쟁에 대하여 매우 교훈적인 방침을 취하고 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선진적 자본의 대표자들이 전쟁에 대한 비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줄창 표명하고 있다.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를 좇아서, 현 시기 사회주의 강령의 핵심은 평화 선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코노미스트>>를 읽는다면, 자신들의 오류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강령은 사회주의 강령이 아니라, 부르주아 평화주의 강령이다. 혁명적 행동에 대한 선전 없는 평화의 꿈들은 단지 전쟁의 공포를 표현할 뿐, 사회주의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코노미스트>>가 평화의 편에 서는 것은 다름 아니라 혁명을 두려워해서다. 예를 들어, 그 잡지 1915년 2월 1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박애주의자는 평화 타결이 대규모의 국제적 군 감축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 외교를 사실상 지배하는 힘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일체의 유토피아를 배격한다. 전쟁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유혈 혁명의 전경이고, 노동과 자본 간의, 또는 대중과 유럽 대륙의 지배계급 간의 격렬한 전쟁의 전망이다....”

이 잡지 1915년 3월 27일자를 보면, (에드워드 그레이 경(卿)이 공약하고 있는 바와 같은) 민족의 자유 등을 보장해 줄 평화에 대한 염원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한다. 이러한 희망이 실현되지 않으면, “전쟁은 혁명적 무질서를 가져올 것이다. 아무도, 이 무질서가 어디서 시작해서 무엇으로 끝날지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잡지는 말한다.

영국의 평화주의적 백만장자들이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 추종자들을 위시하여 그 비슷한 류의, 평화를 동경하는 사회주의자들보다 오늘의 정치에 대해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첫째, 부르주아들은, 기존의 “힘들이 외교를 사실상 지배하는” 동안에는, 즉 자본가계급이 수탈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적 평화에 관한 언사들은 공허하고 우매한 유토피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둘째, 부르주아지는 향후 전망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내려, ‘유혈 혁명’과 ‘혁명적 무질서’를 내다보고 있다. 부르주아지에게는 사회주의혁명이 언제나 ‘혁명적 무질서’로 보인다.

자본주의 나라들의 현실 정치에서는 평화에 대한 공명이 세 종류로 나타나고 있다.

1) 보다 계몽된 백만장자들은 혁명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기 평화를 바란다. 그들은 어떠한 ‘민주주의적’ 평화 (무병합의, 그러나 제한된 군비를 동반하는, 등등)도 자본주의 하에서는 유토피아라고, 냉정하고 올바르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시민적 유토피아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 기회주의자와 카우츠키 지지자 등이다.

2) 평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몽매한 인민대중 (소부르주아, 반(半)프롤레타리아, 일부 노동자들 등등)은 그러한 동경으로 인해 전쟁에 대한 항의 표출을 확대시켜가고 있다. 그리고 고조되곤 있지만, 아직은 막연한 혁명적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3)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계몽된 전위대가 대중의 감정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대중의 커져가는 평화 갈망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민주주의적’ 평화라는 속물적 유토피아를 지지하기 위해서나, 박애주의자와 정부당국과 부르주아지에게 기대를 걸라고 독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연한 혁명적 감정에 명확함을 불어넣고, 전전(戰前) 정치의 수천 사실들로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작업을 대중의 경험과 감정에 근거하여 진척시킴으로써,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정부에 대한 대중적인 혁명적 행동의 필요를 (그리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로서 그러한 혁명적 행동이 필요함을) 체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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