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39호 202111
작성자
미래에서 온 편지
작성일
2021-12-01 17:31
조회
9778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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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11110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편지를 띄우며 [제목을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 편지를 띄우며 □ 기획 : 2022년 대선 체제전환을 위한 7대 과제와 방향 □ 이슈 : 트로이카의 부활 □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 정세 : 기생 착취자의 출현 □ 세계 : 인도 케랄라의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01 □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 사람 : 질문을 품은 아나키스트, 이현우 □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5 □ 도서 : 기후위기와 기후불평등 극복을 위한 투쟁 □ 영화 : 연상호가 바라보는 세상 - 지옥 □ 사진 : 백년 경계 너머로의 여정

Date 2021.12.0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기획 : 2022년 대선 체제 전환을 위한 7대 과제와 방향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기획 : 2022년 대선 체제 전환을 위한 7대 과제와 방향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기획 : 2022년 대선 체제 전환을 위한 7대 과제와 방향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10202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기획 : 2022년 대선 체제 전환을 위한 7대 과제와 방향 홍석만 참세상연구소 연구원 이제, 정권이 아닌 체제를 바꿀 때  지금 한국 사회는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 위기와 생태 위기 이로 인한 우리 삶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 경제는 IMF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어 코로나19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과거 두 차례의 경제 위기 극복이 노동자·민중의 희생에 기초해 이뤄지고 있듯이, 최근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위기 역시 노동자·민중의 일방적 희생을 낳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경제가 성장해도 우리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하고 있으며, 새로 창출되는 고용은 ‘저임금·불안정 일자리’뿐이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경제를 장악한 재벌과 자산 소유자에게만 집중되고 있다. 재벌의 사내 유보금은 천문학적으로 커지고 있지만, 가계 소득은 악화하고 있다. 자산 격차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커지고 있다. 경제가 성장해도 자본과 자산 소유자의 부(富)만 늘어날 뿐, 경제 불평등과 빈곤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경제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으며, ‘파이를 키워 나눈다’라는 자본주의 경제 논리는 파국을 맞았음을 말한다. ‘소수 재벌과 자산 불로소득자를 위한 경제’를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경제’로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경제위기와 노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기후 위기·생태 위기 역시 심각하다. 생태 파괴의 결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주기적 창궐이라는 위험 앞에 놓였고, 기후 재앙도 전 세계를 엄습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펜데믹이 그렇듯, 기후 위기의 피해 역시 차별적으로 작동한다. 기후 위기의 주범은 소수의 역사적 탄소 다배출국과 화석 연료를 많이 사용한 대자본임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 국가와 노동자 민중은 기후 위기로 생존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부를 독점하여 경제적 불평등 체제를 낳은 주범이 기후 위기의 주범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불평등 체제와 기후 위기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자, 기후 위기가 자본주의의 결과라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노동자를 더 많이 착취하며, 생태계의 자정 능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을 수탈하는 체제다.  기업 주도의 녹색 산업 창출이나, 착한 소비자 운동으로는 기후 위기와 생태 파괴를 극복할 수 없다. 생명과 생태 파괴의 대재앙을 불러올 핵 발전도 기후 위기의 대안이 결단코 아니다. 기약 없는 탄소 배출 저감 기술 발전과 시장 규제를 통해 이루겠다는 탄소 중립은 독점 자본의 시장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거짓과 기만의 방식일 뿐이다. 과잉 생산-과소비로 낭비되는 물자와 자원은 생산량의 30% 가깝고 이를 필요한 만큼, 계획한 만큼만 줄여도 탄소 배출량의 30% 이상을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지금 성장의 한계를 넘어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되어 경제 규모가 축소되는 역상장을 코앞에 두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이미 0%대에 접어들었고, 기후 위기 확대에 따른 경제 피해의 증가로 빠르면 2030년을 전후로 마이너스 성장(역성장) 국면에 들어간다. 한국 경제도 이제 성장률 1% 대에 들어갔고 2050년 탄소 순배출이 0에 도달하는 탄소 중립을 이루더라도 그즈음 역성장에 들어갈 전망이다. 탄소 감축에 실패해 현재의 탄소 배출량을 지속하면 2030년대 중반 무렵부터 역성장 한다.  위기는 경제 불평등의 심화와 생태 위기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공적 역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의료-주택-교육-돌봄의 영역이 시장에 맡겨져 있어,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정전 체제와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로 한반도 평화는 아직도 염원으로만 남아 있다.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청소년 등 사회적 소수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얻지 못한 채, 차별과 배제를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치관’의 위기도 심각합니다. 사다리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경쟁 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공정성이 유일한 정의인 양 외쳐지고 있다.  이윤의 성장을 뜻하는 자본주의 성장 경제는 현실적, 환경적, 물리적 한계를 맞고 있고 이윤이 아닌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더 많은 이윤-더 많은 생산-더 많은 소비’를 하며 ‘더 많은 노동-더 많은 자연 수탈’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를 ‘필요한 만큼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더 적은 노동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 뒤엎고 바꿔야 한다. 그것이 체제 전환이다. 우리의 삶이 자본의 돈벌이에 내맡겨지지 않고 사회와 국가가 책임지고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 사회, 차별과 배제·혐오가 없는 평등한 연대 사회, 핵과 전쟁 위기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  2022년은 대통령 선거와 지방 선거가 연이어 있는 해이다. 특히 2022년 대선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를 넘어 코로나19를 계기로 부각된 한국 사회 전환의 방향을 둘러싼 대격돌이 벌어지는 장이 될 것이다. 민주당, 국민의힘과 같은 보수 기득권 정당은 경제 위기-생태 위기-삶의 위기를 낳은 공범으로 이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말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를 좀 고쳐 쓰자는 소위 ‘진보 정치’로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자본주의 너머’를 현실로 만들고 이를 향해 투쟁할 때 ‘경제 위기, 생태 위기,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정권이 아니라 체제’를 바꿔야 한다. 한국 사회 대전환의 주체는 자본도, 국가도 아닌 바로 우리 노동자·민중이 되어야 한다. 체제 전환의 대안 정치로서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 정치 운동이 본격화되어야 한다. 1. 재벌 중심 경제 체제에서 만인을 위한 사회적 경제 체제로 전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 재편이 완료·강화되면서, 재벌과 초국적 자본의 한국 경제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의 자산은 GDP의 60%에 달할 정도로 소수 재벌에 의한 경제 지배력이 커졌다. 정부 특혜 아래 재벌은 핵심 산업, 제 2금융권,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재벌은 반노동 체제, 하청 업체 불공정 거래, 중소 영세 자영업자 생존권 침탈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고 있다. 그 결과 2020년도 3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은 1,045조 원이 넘는다.  특히, 플랫폼 독과점 기업이 재벌화하여 시장 지배를 확대·강화하고 있다. 소비자들에게 편익을, 노동자에게는 유연한 근무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플랫폼 독점 자본은 비용의 일부를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노동자들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면서 이익을 착취해 가는 자본일 뿐이다. 플랫폼 자본의 과도한 이익은 물가를 높이고, 실질 임금을 낮추어 중소 생산자와 노동자, 대다수의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한국 경제 구조는 재벌·독점 기업을 중심으로 하청 계열화 되어 있다.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생산 영역에서 재벌과 플랫폼 독점 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기간 산업의 경제적 위상은 막대하다. 따라서 생산 영역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관건은 재벌과 독점 기업의 지배 구조(총수 일가의 황제 경영 구조)를 개혁하는 재벌 개혁 수준을 넘어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곧 재벌·기간 산업과 플랫폼 독점 기업을 사회화하여 국유 기업 또는 공기업으로 바꾸고, 기업에 대한 노동자·사회적 통제를 결합시켜, 기업 경영의 성과를 노동자를 비롯한 전 사회 구성원이 골고루 누리는 기업으로 재편해야 한다. 또한 재벌이 쌓아 놓은 막대한 독점 이윤을 환수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에 투자하거나. 최저임금 인상 등의 노동자 삶의 질 개선, 노동자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재원으로 쓸 수 있다.  한편, 우리 사회는 2020년 기준으로 상위 1% 가구가 전체 가구 보유 토지의 32.2%를 갖고 있다. 상위 10%(141만 세대)로 확대하면 보유 비중이 77.5%에 달한다. 나머지 90%, 약 1300만 가구가 고작 22.5%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법인의 토지 소유 불평등은 더 심각한데, 2020년 기준 상위 1% 법인 2,361곳이 전체 법인 보유 토지의 76.1%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땅값은 2018년 말 기준 1경 1,500조 원이며, 이중 민간 보유 땅값은 9,500조 원으로, 1979년 말 325조 원에서 40년 동안 9,164조 원, 문재인 정부 2년 동안에만 2,054조 원 상승했다. 문재인 정부 상위 1%에 속하는 사람 1명당 부동산 불로소득은 연간 25억 원으로 상위 1% 근로 소득(2017년 기준 2.6억)의 9배, 근로 소득 평균(2017년 3,500만원)의 70배에 달한다. 토지와 주택은 재산 형성의 수단이 될 수 없는 모두의 소유물이다. 토지 국유화 정책을 통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불로 소득을 막고 주택 등 택지 개발의 이익이 공공의 이익이 되도록 전환해야 한다.  토지뿐만 아니라 금융 불평등도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전체 배당 소득(22.7조) 중에서 상위 0.1%가 47.1%(10.4조)로 거의 절반을 가져갔다. 상위 10%로 확대하면 93.1%에 해당하는 20.5조를 챙겼다. 이자 소득(총 18조 원)도 마찬가지인데, 상위 1%가 45.5%(8.2조)을 챙겼고, 상위 10%가 전체의 91.0%(16.3조)를 가져갔다. 이처럼 금융 소득 양극화 심화는 물론이고, 상위 계층의 근로 소득 대비 불로 소득 쏠림 현상도 야기한다. 하위 10%가 2019년 얻은 배당 소득과 이자 소득은 각각 1.5억, 1.47억에 그쳤다.(한 명이 1.5억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소득 하위 10%인 인구 500만 명의 총 이자 소득이다) 1) 재벌·기간산업·플랫폼 독점 기업의 사회화로 2) 무질서하고 반환경적인 시장 경제에서 생태적·민주적 경제로 3) 재벌과 자산가를 위한 금융/통화에서 노동자·민중을 위한 금융/통화로 4) 토지 사유화에서 토지 국유화로 2. 안전한 일터, 완전 고용을 위한 노동 체제로 전환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확대는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를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우리나라의 상대적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높다. OECD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19년 기준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6.7%이다. 상대적 빈곤율은 전체 인구 중 기준 중위 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인구의 비율로 국민 6명 중 한 명으로, 총인구 5천만 명 기준으로 835만여 명이 상대 빈곤에 놓여 있다. 이러한 높은 빈곤율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저임금과 비정규직-불안정 일자리의 만연, 단시간 노동의 확대, 소규모 사업장과 비정규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 제약, 성별 분업에 기초한 여성 노동의 가치 축소 등이 상대 빈곤과 저임금 구조를 유지·강화시키는 원인이다.  따라서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깨기 위해, 비정규 악법 철폐, 정리해고제 철폐,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비정규직 우선 해고 금지, 생활 임금을 이뤄야 한다. 더불어 저임금 구조를 유지시키는 성별 분업에 기초한 성차별적 임금-고용을 성평등적 임금-고용으로 바꿔낸다. 또한, 모든 노동자의 ‘노동 3권을 실현’과 함께 ‘노동할 권리’와 ‘정당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을 권리’로 확장한다. 이는 배제와 예외 없는 노동 기본권인 것이다. ‘근로기준법 예외 규정 폐지 및 전면 적용 운동’으로 플랫폼 노동을 포함한 특수 고용 노동자,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 확대를 이뤄낸다.  OECD의 2020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 사회 전체 취업자의 평균 노동 시간은 1,908시간으로 가장 적은 독일의 1,332시간보다 43%이상 길고, 심지어 노동 시간이 길다는 일본의 1,598시간보다도 300시간 이상 길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일본의 노동자들보다 1년에 한 달 반 정도를 더 일한다. 게다가 산재 사망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죽음, 과로사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장시간 노동은 건강의 악화, 작업 중의 사고 위험 증가, 여가의 부족 등을 야기하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주 당 노동 시간을 30시간으로 정하며 연간 총 노동 시간도 우선 1,500시간 대로 낮춰야 한다. 노동 시간의 제한은 사회적으로 일자리를 나누는 효과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이러한 노동 시간의 단축은 연장 근로 제한의 적용이 없는 근로 시간 특례 업종 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루어져 실질적으로 모든 노동자가 그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현재 자본주의의 구조 위기와 생태 위기 속에서 성장률은 축소 또는 역성장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그 속에 디지털·산업전환이 이어져 민간의 고용률은 나날이 떨어지고 실업 인구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는 경기 순환 국면에 일시적 직업을 제공해 실업을 해결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고용 보장’이라는 기본적 요구의 실현은, 그 요구를 체제 변혁 전망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방법 뿐이다. 실업과 불안정 노동층 양산을 통해 축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본에 맞서 ‘생활 임금이 보장된 사회·국가 책임 기본 일자리’를 실현해야 한다. 1) 개인별 이중 노동 시장에서 완전 고용 보장 체제로 2) 저임금-장시간-불안정 노동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동으로 3) 이윤 우선인 노동에서 생명과 안전 우선인 노동으로 3. 모두가 잘 사는 사회·국가 책임 복지 사회로 전환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의 복지는 ‘개인’의 책임으로, 그것도 ‘높은 부채’로 지탱되고 있다.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2020년 200.7%로 가처분 소득의 두 배를 부채로 끌어다 쓰고 있다. 특히 부채의 절반 정도가 주택 마련이나 전·월세 보증금으로 충당되고 있어, 노동자·민중은 부채에 저당잡힌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 취약한 복지는 주택 소유를 노후 복지 대책의 주요 수단으로 만들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고용 불안정의 증가, 공적 복지의 미비는 중산층의 부동산 의존성을 더욱 심화시켰는데, 이는 부동산 시장의 붕괴가 곧 노후 복지의 붕괴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노동할 능력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바로 복지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복지는 개인보다는 가족이, 가족보다는 지역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훨씬 비용도 적게 들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의 이윤 논리가 최고의 가치인 한국 사회에서 복지는 개인이 책임져야 할 것으로,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자본의 이윤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에 현 복지 체계를 사회(국가)가 책임지는 방향으로 확 바꿔야 한다.  따라서 복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주택 의존적인 복지 해결에서 벗어나 무엇보다 주택 문제와 주거 불안정을 해소하고 교육, 의료 및 필수 공공 사회 서비스의 시장화, 민영화에서 벗어나 공공성을 강화·확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가 복지를 책임지는 복지 사회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1) 주택을 사는(buy) 것에서 사는(live) 곳으로 2) 입시를 위한 경쟁 교육에서 필요에 따른 평등 교육으로 3) 돈 있어야 받는 의료에서 필요하면 받는 의료로 4) 사회 보장 수준의 획기적 향상, 가사·돌봄·임신·출산·보육·요양 등 필수 사회 서비스 보장 5) 교통·운송·통신·전기 등 공공 서비스의 시장화에서 공영화로 6) 문화·예술의 노동 가치와 공공성 확대 4. 차별과 폭력 없는 평등·연대 사회로 전환  우리 사회에서는 성별, 성정체성, 신체 조건, 외모, 나이, 국적, 인종, 가족 형태, 종교, 사상, 전과, 학력, 재산, 계급 등에서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차별과 폭력, 혐오가 만연해 있다. 특히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자 여성이며 다양한 영역에서 소수자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노동권과 성평등 그리고 차별 금지에 대한 교육과 처벌의 책임을 방기해 왔고 차별과 폭력을 암묵적으로 용인해 왔다.  특히 여성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상호 결합된 구조 아래 억압-차별을 받고 있다. 성별 분업 구조는 여성의 ‘노동’을 부차화된 노동으로 전락시켜 차별을 정당화하고,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의 이중고를 유지시키며, 여러 형태로 여성의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2020년 성별 임금 격차’ 조사 결과를 보면, 남성 1인당 평균 임금은 7,980만원, 여성은 5,110만원으로 임금 격차가 35.9%에 이르렀는데,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가장 크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45%로, 남성 29.4%보다 15.6%포인트 더 많으며, 여성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4.1%로, 남성 12.0%보다 2배 많았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3월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32.5%로 OECD 임금 격차 평균(12.8%)의 2.5배나 됐다.  한편, 여성은 낙태권은 물론이고 임신·출산 등의 재생산의 권리도 박탈당했다. 인구 급증이 문제될 때는 강제 낙태와 피임으로 여성의 몸을 통제했고, 저출산의 시기가 도래하자 ‘낙태 단속’으로 또 여성의 몸을 통제했다. 이성애 중심 가족을 강요하고, 혼인 밖 여성들의 임신·출산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이렇듯 여성은 몸과 노동 모두를 국가(사회)에 의해 통제 당하고 있다. 여기에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이중적 성규범은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고,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감정 노동, 일상화되어 있는 성희롱과 추행 등은 여성들의 계속된 저항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성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디지털 성범죄와 같이 더 잔인하고 교묘하게 여성에 대한 폭력은 확대되고 있다.  또한, 한국 사회에는 성별, 성적 지향 및 성정체성의 차이, 장애 유무, 연령, 인종과 국적 등의 차이가 차별과 억압·배제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특히 성소수자가 그렇다. 자본주의는 자본 축적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 이성애 가족 만을 정상적 가족으로 인정하면서, 성소수자를 비정상으로 낙인 찍어 왔다. 그 결과 자본주의 시대 들어 그 전 시대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심화되었다. 장애인 역시 자본을 위한 이윤 생산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용 차별과 고용 배제, 그리고 사회와 격리된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청소년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제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주민의 비인간적 삶 역시 자본 논리에 기인한다. 정부는 자본을 위해 경제 상황에 따라 저임금-무권리의 이주 노동자를 활용하기도 하고 단속-추방하기도 하면서 일회용품처럼 취급하고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은 농촌 남성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 취급을 받고 있으며, 정치적·경제적 고난을 피해 한국 땅으로 온 난민들은 한국 정부의 비인권적 난민 정책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기본권을 누릴 주체를 ‘사람’이 아닌 ‘국민’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포괄적 차별 금지법’조차 제정하지 않음으로써 차별과 배제, 혐오를 차단할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한 노력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1) 가부장적, 성차별적 폭력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폭력 없는 성평등 사회로 2) 성차별적 노동 조건에서 여성 노동권 보장과 임금 차별 철폐로 3) 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 없는 평등 사회로 5.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기후 정의·생태 사회로 전환  현재 지구는 인류와 생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생태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더 많은 ‘생산’을 필요로 하며, 그래야만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윤을 낳을 수 있는 한 자본주의는 석탄과 석유 같은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하지 못한다. 셋째,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환경의 보존과 인류 삶의 향상이 아니라 이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자연을 약탈하면서 인류의 삶과 생활을 파탄 내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와 파괴적 생산으로 인해 오늘날 세계는 전지구적 생태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지구는 기후 재난, 생물종 멸종, 생태계 교란을 낳는 기후 위기와 핵발전으로 인해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다.  정부는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2018년 대비 40%까지 감축하고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문제가 제일 심각한 석탄·화력 발전의 획기적 축소를 약속하지 않고, 탄소포집저장활용(CCUS)기술, 수소 환원 제철 기술 등 언제 상용화될 지 알 수 없는 미래 기술 발전을 조건으로 계획을 수립해 있다. 게다가 에너지, 산업 부문, 수송과 건설 등 대부분의 전환 부문이 재벌과 독점 기업의 시장 형성에 맞게 설계되어 있고 국가 투자 또한 이 시장을 위한 연구 개발이나 인프라 구축, 전환 기업(현재 탄소 발생이 많은 기업)들의 이윤 축소에 따른 보조금 지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화석 연료 공급 감소에 따른 가격 폭등과 다시 그에 따른 화석 연료 사용량의 증가,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15개 주요 화석 연료 생산 국가의 현재 생산량 계획은 기온 상승을 1.5°C 이내로 제한하는 파리 협정 시나리오의 목표 생산량보다 2030년까지 약 110% 더 많은 화석 연료를 생산하고, 2°C로 제한하는 목표 생산량보다는 45% 더 많은 화석 연료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40년에 이 초과 생산량은 각각 190%와 89%로 증가한다.  이 같은 현실은 정부의 신기술 개발과 재벌·독점 자본과 시장 형성 중심의 탄소 중립 계획으로는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전 세계가 이와 유사한 계획으로 현재의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도 전 세계에 산불과 홍수 등 환경 재앙이 끊이지 않았고 인류가 관측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온도가 높은 7월을 보냈다. UN 산하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이런 기후 재앙이 더 강도를 더하고 더 반복적으로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탄소 중립의 실패, 1.5℃ 이상 기온이 더 오를 경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기후 재앙과 함께 공급망 교란, 축소 등 경제위기의 심화로 세계적인 기아와 빈곤, 사망률의 확대 속에 더 큰 위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결국 시장 중심의 탄소 중립이 아니라 생산량의 30% 가까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물자의 생산을 줄이고, 실제 재생 에너지 발전을 확대하기 위한 계획과 투자를 가능하게 하고, 탄소 고배출 산업에 대한 즉각적인 통제와 탄소 배출 의존이 많은 저소득 국가에 대한 약속된 국제적 지원을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은 무엇보다 먼저 (신속히 전환할 수 있도록) 화석 연료 회사를 공공 소유로 전환하고 화석 연료 생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재벌과 주주가 아니라 노동자와 지역민들의 민주적 통제 하에 있게 하는 데 달려 있다. 이를 통해 화석 연료 회사의 일자리를 녹색 기술 및 환경 회사로 이전하는 계획된 공공투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탄소 집중화된 수도권을 이전하고, 대도시를 생태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 지방 분권화 및 지역 기반 에너지 공급을 통해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고, 지역 도시 균형 발전을 위해 국·공영기업 이전, 국립대학 이전, 국·공립병원 이전과 신규 주택 건설 금지, 1인 주택으로의 전환과 공유 주택 활성화와 대중교통 공영화 등으로 자가용 소유 억제를 시행하며 수도권 전환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또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를 생태 도시로 전환하는 장기 계획을 수립해 주거, 직장, 학교, 공공 서비스, 문화, 에너지 등이 (농촌을 수탈하는 것이 아닌) 생태적으로 연결되며 도보와 자전거, 장애인 등 보편적 이동권이 보장된 도심 대중교통으로 가능한 에너지 절약형, 탄소 중립형 도시로 전환한다. 1) 성장이 아닌 생태 사회로 2) 기후 정의를 통한 탄소 중립 실현으로 3) 탄소 중독 일자리에서 국가 책임 기후 일자리로 4) 반환경 공장식 농·축산업에서 생태적 농·축산업으로 5) 대도시를 생태 도시로 6. 핵과 전쟁 위기가 없는 평화 사회로 전환  한국전쟁 이후 정전(협정) 체제가 유지되고 있어, 전 세계적 냉전 해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냉전의 동토로 남아 있다. 북한은 핵-미사일을 날로 고도화하고 있으며, 남한은 북핵을 막는다며 한국형 삼축 체계(한국형 미사일 방어 체계, 킬 체인, 대량 응징 보복 계획)를 2022년까지 구축하는 공격적 군비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또 미국과 함께 대북 선제 핵 공격을 포함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진행하면서, 대결적 대북 정책을 펼치고 있다. 남북의 군비 경쟁은 치열하여 2019년 남한 군사력은 세계 7위, 북한은 18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 한반도에 평화의 봄은 오지 않고, 남북한 민중의 복지에 쓰일 막대한 자금이 군비 경쟁에 낭비되고 있으며, 한반도는‘전쟁위기’가 항상화된 곳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현‘정전 협정 체제’를 ‘평화 협정 체제’로 바꿔야 남북 대립과 북미 대결을 종식하고, 미·일·중·러가 한반도에 개입하는 고리를 차단할 수 있다. 평화 협정의 내용에는 남북 간 불가침 및 상호 체제 인정, 북핵 폐기는 물론이고 미국의 남한에 대한 핵우산 폐기, 남북한 모두의 획기적 상호 군축이 담겨야 한다. 남한이 미국과, 북한이 중국과 맺은 군사 동맹과 한미 합동 군사 훈련 폐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즉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하고, 한반도 유사 사태 시 UN 결정 없이도 직접 개입할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한다. 국가보안법 등 남이 북을 적으로 규정한 법도 폐지한다.  또한 한반도의 핵전쟁 위험을 없애기 위해, 첫째, 북한에 대한 제재와 군사적 압박이 아니라,‘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둘째, 북한의 핵 무장을 이끈 원인인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철회(북미 수교-평화 협정 체결-북핵 폐기’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북한의 선제 핵 포기 압박이나 북한의 핵 무장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평화 협정은 모두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셋째, 북핵 폐기와 더불어 미국의 남한에 대한 핵우산과 대북 선제 핵 공격 훈련을 같이 폐기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핵무기 개발과 보유, 수송, 훈련까지 금지시키는 ‘한반도 비핵 지대화’를 이뤄낸다.  한반도 비핵 지대화를 기초로 비핵 국가인 남·북한과 일본에 대해 핵 보유국인 미·중·러의 핵 공격을 금지하는 ‘동북아 비핵 지대화’를 추구한다. ‘동북아 비핵 지대화’는 궁극적으로 핵 보유국의 모든 핵무기 폐기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전세계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목표로 ‘핵무기 개발, 시험, 생산, 비축, 사용, 사용 위협, 이전, 타국 배치를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핵무기 금지 조약(TPNW) 비준 운동을 국제 연대 하에 전개한다.  한편, 불평등 조약으로 대표되는 한미방위비분담금협정, 소파협정을 넘어 양 협정의 원천이자 주한미군 주둔의 근거가 되는‘한미상호방위조약’그 자체를 폐기한다. 한미일 동맹 완성의 핵심 고리인 지소미아를 폐기한다. 식민 지배 사과 없이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왜곡된 전후 한일 관계의 시작점이자, 한미일 동맹의 시발이 된 65년 한일협정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평등한 한미 관계와 왜곡된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 호혜에 기초한 한미관계·한일관계를 지향한다.  무엇보다 ‘평화 협정 체결-한미일 동맹 폐기-한반도 비핵 지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질서 구축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안이자, 동북아에서 미일-중러 대립이라는 21세기 형 신냉전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막는 기초이다. 이에 ‘한반도 평화’와 함께 ‘제국주의 반대, 반전·평화, 호혜와 평등의 동북아’를 지향하며, 동북아 평화와 호혜와 평등의 외교 관계를 염원하는 동북아 민중의 국제 연대와 노동자 민중이 주체가 되는 한반도 통일을 적극 추진한다, 1) 한반도 정전 체제를 한반도 평화 체제로 2) 한반도·동북아 비핵 지대화로 3) 한미 동맹에서 동북아 평화·평등 관계로 7. 노동자·민중이 주인인 민주주주의 사회로 전환  한국 사회는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등 권력 기구는 물론이고 행정기관까지 동원하여 노동자·민중을 통제·억압하고 있다. 이들 국가 기구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대선 개입, 종북 몰이, 간첩 사건 조작, 통진당 해산,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등을 적극 주도하였다. 또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와 공무원·교사의 정치 활동의 자유도 억압하고 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총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시켰다.  정권이 교체되어도 이들 국가 기구의 폭력적·억압적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들 국가 기구의 지위와 역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인데, 이로 인해 양심, 사상, 학문,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정치 활동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 노동자·민중의 정당한 목소리는 재갈 물리고 노동자·민중의 활동은 심각하게 탄압받는다. 즉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권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을 표방하지만, 현실은 소수의 지배·기득권 세력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입법부는 거대 부르주아 보수 정당이 독점하여 자본과 기득권층의 청부 입법 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 행정부 역시 보수 정당과 보수 관료층에 의해 철저히 장악되어 있다. 현재의 헌법은 사유 재산 제도와 시장 자유주의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1987년 이후 한국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의 민영화, 부동산 시장의 확대, 금융 자본주의의 확산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 증가한 결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불로 소득자와 임금 소득자 사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확대, 자본주의적 신분제를 고착화 시키고 환경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념 아래 자본의 무한 이윤 추구와 개인 간의 무한 경쟁을 당연시한 반면 사회적 차원의 공공성과 개인의 생존권 및 노동권의 보장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 결과, 불평등은 고착화되고 국가 간 패권 경쟁과 환경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생태와 사회가 시장에 우선하고, 공공이 공정에 우선하며, 연대가 경쟁에 우선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로 2) 대리 정치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 확대 강화로 3) 국가 기구의 민주적 개혁으로 4) 21세기 생태·노동·민주 사회 헌법 체제로

Date 2021.12.0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이슈 : 트로이카의 부활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이슈 : 트로이카의 부활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이슈 : 트로이카의 부활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9586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이슈 : 트로이카의 부활 >>>> 업로드 준비중 <<<<<<

Date 2021.12.0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9964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강연 : 김규항 칼럼니스트 정리 : 이용규 편집위원 <혁명노트>라는 책에서 중심 화두로 ‘물신성’을 얘기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상황이 일어났다. 물신성이 뭐냐는 물음이 쏟아진 것이다. <자본론>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부분은 ‘상품과 화폐’ 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르크스 본인이 어렵다고 한 부분이다. 그런데 ‘물신성, 물신 숭배’ 부분이 더 어렵다. <혁명노트>에서 물신성의 정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을 받게 되었다. (옮긴이 주: 카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제1권의 1장은 상품과 화폐의 형태와 가치를 설명한다. 경제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부분이라 다른 부분보다 읽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물신성’이란 ‘상품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이란 말로 1장 제4절에서 처음 등장한다. 김규항 작가는 2020년 출간한 <혁명노트>에서 물신성을 주된 화두로 삼았다. 김규항 작가는 강연 전반에서 같은 책의 이름을 <자본론>과 <자본>으로 섞어서 언급했으며, 여기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본론>으로 적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세계는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상품이 아닌 것이 없으며,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임노동으로 산다. 직장 생활도 내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만들어졌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분업 체계의 형성 애덤 스미스는 ‘교환’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정의했다. <맨큐의 경제학>의 경제학 10대 원리에서는, ‘교환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적혀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합리적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이런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게 된 이유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 사회가 유지되려면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물질적 재생산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물품이 적절히 생산되고 적절히 분배되어야 하고, 이것이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달리 말하면, 노동이 적절히 배분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사회든지 공통적인 것이다. 봉건 사회에는 공동체의 질서가 있었다. 생산하는 계급이 따로 있고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계급이란, 역할 분담이 있었으며 그것이 전통적 질서로 이어지고 반복되었다. 누가 뭘 얼마나 생산하는지의 문제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근데 이것은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해체되었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다. 사적 소유권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기본이다. 누가 무엇을 생산하고 갖는지의 문제를 관여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고도의 분업체계가 형성되었다. 농경사회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많아지고, 생산력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산자들이 특정한 생산 물품의 생산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회적 분업체계가 형성되었다. 사회적 분업체계의 유지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유지되는가. 사적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이란 개인이냐 집단이냐의 구분이 아니라, 사적인 이해만을 생각하며 생산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생산자’란 기업의 형태다. 사적 이익만 생각하며 생산하는 생산자들이란 것이다. 사회에 이것이 어떻게 분배되고 사용되는지 생각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생산을 전담하는데, 사회적 분업체계는 어떻게 유지되는 것인가. 사적인 노동이 어떻게 사회적 차원의 노동이 되는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이를 -훌륭하게는 아니더라도-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있다. 그것은 모든 생산자들이 자기 생산물을 시장에 들고 나와서 교환하는 것이다. 노동 생산물을 상품의 형태로 교환하는 것이 이 사회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상품은 사용가치가 전부 다르지 않나? 상품이 교환가치가 있다는 것은 사용가치가 생산자가 아니라 남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교환이 가능하다. 모든 노동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로 교환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수많은 상품들이, 사용가치가 다 다른 상품들이, 어떻게 일정한 어떤 규칙 기준을 갖고 교환될 수 있는가. 그 기준이 바로 가치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이 가치는 바로 ‘사용가치가 다른 수많은 상품들이 교환가치를 갖게 하는 어떤 기준’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싸거나 비싸다는 말은, 대개는 그 상품이 가진 가치에 비해서 싸다, 비싸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상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가치를 구입한다는 것이다. 가격을 지불하고 물을 수 있다: 현재 이 가치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사용가치다. 이를 만드는 것이 노동이다. 용접노동이든 재봉노동이든 노동은 전부 관련성이 있지도 않고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을 유용노동이라고 한다. 유용노동의 차이를 제거하고, 모든 노동은 인간의 뇌, 신경, 근육의 작용을 제출한 동등한 것이라고, 동등성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추상적 인간 노동’이다. 노동, 즉 상품의 가치라는 것은 바로 추상적 노동이고 그것의 응고물이다. 노동가치에 대한 큰 오해가 있다. 노동가치론을 얘기하면, 자본가의 혁신 정신, 기업가 정신, 창의성 등이 배제된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노동가치론을 마르크스가 만든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같은 경제학의 시조가 만든 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는 노동이다’란 개념을 규명하거나 주장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물론 고전파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재정립했다. 그 차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재생산이 어떻게 가능한 사회가 되었나’를 해명하는 데 있었다. 상품이 적정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는 것은, 이 상품에 투입된 노동이 사회적 노동의 일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분업체계의 한 요소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투입되었다고 바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로 확인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리하여 이 상품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통해 사적 노동이 이루어진다. 이 방식이 수반하는 특별한 현상,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려고 하는 물신숭배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 앞에 자립하는 상품 물신숭배라는 말은 원래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상들이 만든 말이라고 한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미개한 종교나 행동, 나무나 돌 같은 데 절을 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비웃는 차원에서 ‘페티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마르크스는 그 말을 자본주의적 몽상에 사용한 것이다. 우리가 근대적, 계몽된 인간이란 자부에 차 있지만 우리야말로 제대로 된 물신숭배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적 생산자들은 인격적 주체로서 관계하며 교환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산물은 교환을 통해 비로소 연결된다. 인간들의 사회관계가 상품들의 사회관계로 뒤집혀서 나타난다. 얼마 전 고등학교 교사 친구가 말해준 에피소드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노동의 소중함에 대해 말을 했다고 한다. 농부의 노동 덕에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버스 기사의 노동 덕에 학교에 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본인은 생각이 다르다고 했다고 한다. 왜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느냐, 우리가 그들의 노동을 구매하니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친구는 그 말에 반감이 들었지만 논리적으로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상품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 대체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이 부분이다. 시장에서 쌀을 샀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농산물과 내 화폐의 관계이지, 농부와 나의 관계는 아니다. 가치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물신숭배는 이것을 상품 자체의 속성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건 거부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를테면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일정한 가격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다 보니, 그것은 당연히 그 상품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생산자들도 계속 경쟁 상태에 놓여 있고, 뒤처지면 파산하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시장에서 계속 변동되기 때문에 이를 촉각을 곤두세워 살피고 예측해야 한다. 예측한다고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자본가들은 이를 두고, 마치 자신들이 경제적 주체로서 사물들의 운동을 분석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사물들의 운동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치’가 동등한 인간 노동의 추상적인 응고물이라는 생각,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가 가려져 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고 할 틈도 없고 할 겨를도 없다. 기업가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딴소리하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노예와 같다. 성공을 했다는 것은 주인의 기분과 의사에 부응했다는 뜻이 된다. 상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 앞에 자립하고, 자신들끼리, 그리고 인간과 관계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고 인간은 숭배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상품물신숭배를 종교에 비유한다. 이 말이 우리에게 쏙 와 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상품을 상품으로 교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 가치형태인 화폐를 사용한다. 상품 물신숭배는 화폐의 물신숭배의 형태로 본격화하고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독특한 상황이다. 이를테면 유럽의 봉건제에서, 농노가 일주일에 3일 노동했다면 그 3일이 자기 노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수탈하는 영주도 자신이 사용하는 생산물이 누가 만든 것이라는 걸 안다. 생산물들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대체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신숭배는 환상이다’라는 표현의 뉘앙스를 오해할 수 있다. ‘환상’이란 말은 자본론 원전에서 ‘Phantasmagoric’이란 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에서 유행했던 환등쇼(판타스마고리, Phantasmagorie)를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구조가 은폐된다는 말에 가깝다. 자본주의적 구조가 은폐된 상태로 멀쩡한 세계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천동설 같은 건데, 옛날 사람들은 실제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망상이 아니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객관적 실재였다.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구분해야 한다. 단지 망상이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모든 사고 체계가 객관적, 합리적으로 돌아가니까. 물신숭배라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물신숭배를 전제하는 사회 물신숭배라는 현상의 뿌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학이다.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는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로 나타난다고 분명히 규명했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차원까지는 가지 못했고 그 작업을 마르크스가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경제학은 소위 말하는 ‘효용가치론’이다. 효용이라는 것은 사용가치와도 다르다. 사용가치는 그 상품 자체가 가진 그 자연적 속성이다. 탁자는 무언가를 올려놓거나 먹을 것을 퍼먹을 수 있는 식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이다. 이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효용은 사용가치에 대한 한 인간의 주관적 욕구와 충족도를 얘기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주관적이고,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고 한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상품들에 대한 효용성은 또 다르다. 그래서 효용은 가치가 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현대 경제학을 그래서 ‘속류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경제학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좌파는, 그것을 그들이 가치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대 경제학의 관심은 가격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생산, 유통, 소비로 나누어진다면 지금 경제학은 유통만을 얘기한다. 시장 구매와 판매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품 설계의 본질과 구조에는 관심이 없고 상품의 설계, 현상, 형태, 그 인과관계만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경제학이다.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관심은 그런 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보다 ‘시장경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시장경제를 분석하는 틀의 가장 핵심은 역시 구매와 판매, 유통과 관련된 수요와 공급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가치가 노동이라는 것까진 고려했는데, 지금은 아예 가격에만 관심을 갖는다. 물신숭배를 아예 전제하고, 거기에 기반한 경제학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제도의 기본 틀은 무엇인가. 모든 상품 수요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교환하는 관계라는 전제다. 빈곤, 양극화,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그것은 좀 애석하지만 이 사회의 기본 틀 자체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기가 소유한 상품을 교환하는 관계에 있으며 그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계급 사회’라거나 ‘자본주의 이윤의 원천은 잉여가치 착취’라는 식의 얘기는 사실은 이미 처음부터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 법-제도와 연결되어 우리의 상식, 학문, 종교, 문화가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다. 노동은 물신숭배를 통해서 어떻게 바뀌는가 물신숭배가 만들어지는 문제, 거기서도 근본적인 얘기를 할 것이다. 노동은 물신숭배를 통해 어떻게 바뀌는가.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상품의 가치란 기준을 통해 교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른 유형의 노동-인간의 노동-이 사실 동등하다는 ‘추상적 인간 노동’이라는 개념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을 살펴봤다. 그리고 분업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동등하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모든 노동은 의존적이고 서로 돕는 관계다. 이것이 분업사회의 원리다. 그런데 가치가 상품 자체의 속성이라고 보게 되면 노동은 개별적인 것이고 경쟁관계에 있게 된다. 노동력 가격의 차이가 나는 것은 그래서 합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귀천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모든 사람들의 능력과 노력의 합리적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 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이것이 고상하거나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그것이 동등하기에 분업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노동에 차등이 있다면 분업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분업이 성립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그 동등성이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동등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신숭배를 통해서 이 동등성이 은폐된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까 그 선생님보다 그 학생 얘기가 맞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에서는 인간 평등의 정신 같은 것은 여기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의와 평등의 상한선이 바뀐다. 그것이 공정성이다. 경쟁의 공정성. 공정하기만 하면 차등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능력주의’를 ‘조금 오래된 좌파’들이 아주 개탄하는데, 이것은 비판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경쟁의 공정성이라는 것이 정의의 상한선으로 짜여진 사회에서 노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가. 오히려 미안해해야 한다. 정의의 상한선을 그렇게 고착시킨 사회를 만든 우리가 미안해할 일이다. 물신숭배는 자본의 운동과 폭주를 근본적으로 제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노동과 생태의 위기가 동시에 다가오는, 자본주의 말기에 이른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닥쳐오는 오늘날 위기의 근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상품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품교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사회가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물들과 상품의 형태로 관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물신숭배, 그 비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 노동당이 ‘정권이 아니라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체제를 전환한다는 것은, 분배 차원에서 재분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체제가 바뀐다는 것은 생산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 없다. 생산 영역은 건들지 않는다. 재분배의 문제는 체제 전환의 중간 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좌파들은 그것을 거의 최종적 목적으로 여기는 추세다. 또 시민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리버럴 정치세력에 동조하는 식의 노선을 타고 있다. 혹은, 이것은 안타까운 얘기지만 ‘좌익자선운동’이라고 나는 칭한다. 동정심을 사려는 운동들, 인간이 이렇게 처참해서 되겠느냐,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부각해서 시민의 관심을 확보하는 운동들. 이것이 주축이 되면 이것은 자선운동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변혁운동의 논변을 지닌 것이 아니라, 현 체제 안의 ‘불쌍한 사람 돕기’를 좌파가 도맡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이것을 대중 노선으로 삼고, 계속 패퇴하고 세력이 약해지고 궁지로 몰리는 악순환이 큰 흐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론>이라는 책에 대해서, 우리가 두 가지의 단점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옛날에 읽었다. 또 하나는 날아갔다는 것이다. ‘읽었다’는 말은, 우리가 옛날에 자본론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론으로서 전적으로 부정한다.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읽었다’는 전제가 너무 큰 질병을 만들었다. 이론적으로, 사상적으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날아갔다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아니다. 재벌 독점자본과 국가가 결합한 계획경제다. 국가를 통해 시장을 장악하고 시장의 불안정성이나 위험을 통제해 가며 중소기업을 하청계열로 착취해가며 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자본주의다. 이런 것은 마르크스 당대에는 없었고 <자본론>에 나오지도 않는다. 이 책이 낡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몫이 남은 것일 뿐이다. 다만 지금 형태의 자본주의든 19세기의 그것이든 무관하게, 이 시스템의 본질적인 작동원리, 법칙에 대하여 분명히 해명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오늘날의 독점자본주의는 우리의 몫이다. 월가의 엘리트들은 2008년 공황 이후에 <자본>을 진지하게 읽었다. 이들이 보니, 경제학은 가격만 얘기하는 경제학이고, 더욱이 실물경제를 떠나 금융과 경제가 별개로 돌아가는 이상한 경제다.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엎어지는 이유를 해명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부에서 찾을 수가 없는데 <자본론>이 그걸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은 다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잘 파악해서 거기서 ‘대박’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다만 목적이나 시대를 불문하는 자본의 어떤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 물신숭배와 그 비밀을, 다시 한 번 겸손한 태도로 해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Date 2021.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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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정세 : 기생 착취자의 출현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정세 : 기생 착취자의 출현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정세 : 기생 착취자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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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0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세계 : 인도 케랄라의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01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세계 : 인도 케랄라의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01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세계 : 인도 케랄라의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01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10158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세계 : 인도 케랄라의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01 -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서의 분권화와 주민 참여를 결합한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 정호영(노동당 국제연대재건 트로이카 세계마당)  1996년 8월 17일 주민 계획(people’s plan)으로 시작된 케랄라의 지방자치는 케랄라 주 전체 예산의 35~40%를 할당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방자치제에서 중앙의 심의 없이 예산을 자체적으로 짜고 결정할 수 있다. 이 주민 계획의 시작을 빅뱅이라고 부른 이유가 그 때문이다.1)  케랄라 모델의 입안자였던 EMS 남부디리파드가 집권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토지 개혁이었고 토지 개혁을 어느 정도 이룬 후 바로 다음 목표로 잡은 것이 바로 대규모 대중 조직에 의해서 실현되는 지방자치제였다. 케랄라에서는 선출직 대표나 행정 조직들이 예산 사용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 조직에서 토론된 것으로 예산 사용을 결정하고자 하였다. 기속위임 정치는 선출 공직자가 통제권을 행사하는 대의 정치와는 다르게 인민이 통제권을 가진다.2)  케랄라는 대의 정치라는 한계 내에서 기속위임 정치에서 평의회의 역할을 대중 조직에게 맡기고자 한 것이다. 남부디리파드는 지방자치제가 예산을 쓰는 것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대중을 신뢰하라” 물론 이 대중은 조직되지 않은 다중이 아니라 대중 조직으로 조직된 대중이었다. 케랄라의 지방자치제는 인도 자본주의라는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속위임 에 의한 의행합일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림1> 인도 독립 후 첫 번째 케랄라 주지사 EMS 남부디리파드 우표  몇 번의 연재를 통해서 케랄라에 관련된 지식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케랄라의 지방자치제를 연구해서 한국의 지방자치제와 비교한 후 노동당의 정책에 반영해야 할 필요성은 케랄라 지방자치제가 가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에 있다.3) (1)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서의 분권화와 주민 참여를 결합한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2) 주민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낸 사회 운동과 대중 조직 (3) 주민 계획을 통한 다양한 이해 집단 간의 분열 극복 (4) 주민 계획을 통한 경제 위기의 극복과 성장 (5)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의식적인 노력 (6) 지방자치 정부 부서 - 1,209여 개의 지방자치단체의 주민 계획 관리 (7) 주민 자치 자체 평가 관리를 통한 지자제 간의 경험 공유 (8) 주민 계획에서 정보통신 기술의 도입에 있다.  이 특징들에 대해서 알아 보기 전 우선 케랄라 정치 연구가 왜 의미가 있는지 인구통계학적으로 살펴보고 들어가도록 하자. 케랄라는 인도의 한 주이기는 하지만 인구통계학적 규모로 본다면 웬만한 국가 규모이다. 따라서 케랄라에 대한 연구는 1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브라질의 특정한 도시 포르투 알레그레, 일본이나 영국 등의 특정 도시의 지방자치 사례 연구와는 다르게 한국 지방자치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줄 수 있다.  케랄라의 면적과 인구는 38,863 km²에 3,400만 명이고, 대한민국의 면적과 인구는 100,201 km²에 5,178만 명이다. 인도의 행정 단위인 판챠야트와 도시의 크기는 인도의 주마다 다르지만 케랄라의 경우에는 그람 판차야트의 경우 23,600명 정도, 블록 판차야트는 15만 5,000명 정도, 디스트릭트 판차야트는 168만 4,000명 정도이다. (Government of India, Planning Commission, 2006: 19~20). 우리나라 행정 체계의 경우 2만 이하는 면, 2만 이상이면 읍, 2개 이상의 읍과 면의 인구 합계가 5만 명 이상이고 15만 명 이하면 군, 읍의 인구가 5만 이상이면 시, 시의 인구가 100만이 되면 광역시로 되는 것을 고려해 보면 그람 판차야트가 우리의 읍 면, 블록 판차야트가 우리의 군, 디스트릭트 판차야트가 우리의 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케랄라의 지방자치단체 중 한국의 시, 군 및 자치구 규모의 블락 판챠야트 152개, 도시 판챠야트 65개 판챠야트를 합치면 217개가 된다. 케랄라를 연구하는 것 만으로도 한국 지방자치 전체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을 구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표 1>은 한국과 케랄라를 간략하게 비교한 것이다. 한국 케랄라 인구 51,302,044   (2014년 기준) 33,387,677(2011년 기준) 면적 100,210   km2 38,863   km2 Human   Develop Index 0.891(세계 15위) 0.854(인도내 1위)4) 기초 지방 자치단체 수 한국 기준 227 217(블록+도시) 실제 숫자 비교 227 1,209(구역+블록+도시+그람) 도시 거주 인구 비율 21% (2001년), 47.7 % (2011년) 급속히 증가 중 92% (2014년) <표 1> 한국, 케랄라 비교5) 1) 분권화와 주민 참여를 결합한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  케랄라의 주민 계획이 시작되기 전의 예산은 10%가 되지 않았지만 주민 계획이 시작된 1997~1998년 회계연도 기점에서는 3계층 판차야트로 주가 내려 보내는 이전 지원금은 그 전 회계연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주민 일 인당 이전액 역시 두 배나 증가했고, 그 이후 매 년 약 10% 정도 씩(인플레를 고려한 실질 증가율은 5.5%) 늘어나고 있다.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새로 자치권을 받은 판챠야트가 전통적인 판챠야트를 지배해온 특정 카스트나 기득권 집단6)을 대표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허다했지만 케랄라 주는 다르다. <그림2> 케랄라의 지방자치 행정 체계 구조 . (필자 작성)  케랄라의 주민자치에서의 계획과 예산 할당, 실행, 평가는 가장 하부 단위인 마을(ward)에서 시작되는 상향화로 진행되며, 각 지방자치 단체 간에서 의견은 상급 단체에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향화 과정에서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조율된다. 대의제 정치라는 자본주의 정치 체제의 한계 내에서 기속적 위임에 의한 의행합일로 진행되는 민주주의중앙집권제를 최대한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 다음에 계속 - 1) Indiian Express, 17th August 2021. People’s Planning turns 25: The way forward. https://www.newindianexpress.com/states/kerala/2021/aug/17/peoples-planning-turns-25-the-way-forward-2345656.html 2) 기속위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신재길, 대의 민주주의 자유 위임제의 한계(지난 5월 15일 개최된 ‘2021년 노동당 정책 당 대회’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글) ≪정세와노동≫ 제172호(2021년 6월) http://lodong.org/wp/archives/15536 3) Government of Kerala. Economic Review 2006~2020; Heller, P. 2001, “Moving the State: The Politics of Democratic Decentralization in Kerala, South Africa, and Porto Alegre” in Politics & Society, Vol. 29, No. 1, 131~163.; Heller P., Harilalb K. N. and Chaudhuri, S. 2007, “Building Local Democracy: Evaluating the Impact of Decentralization in Kerala, India.” in World Development, Vol. 35, No.4, 626~648.; Isaac, T. M. Thomas & Franke, Richard W. 2001, Local Democracy and Development, Leftword. ; Oommen, M. A. Ed. 2007, A Decade of Decentralisation in Kerala: Experience and Lessons. New Delhi: Har-Anand Publications.; Saito, Fumihiko. 2008, Ed. Foundations for Local Governance: Decentralization in Comparative Perspective. Physica-Verlag Heidelberg.; 강현수. 2013. 분권과 주민참여를 통한 상향식 지역계획 사례 연구. ≪공간과사회≫. 2013년 제23권 1호(통권 43호); 강현수. 2010. 인도 케랄라의 급진적 개혁을 통한 지역발전 사례. ≪동향과 전망≫, 2010년 봄호, 통권 78호, 148~182쪽. 4) 케랄라는 개발도상국인 인도에 속해 있지만 인간개발지수나 도시화 진행 측면에서는 개발도상국의 사례라고만 볼 수 없다. 주민의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는 HDI(Human Development Index 인간개발지수)를 보면 인도의 HDI는 0.586으로 세계 135위이지만 케랄라 주의 HDI는 0.854이다. 세계 15위인 한국의 HDI 0.891와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HDI측면으로만 보면 그리스(29위, 0.853), 스페인(27위, 0.869), 이태리(26위 Italy 0.872) 수준의 국가이다. 5) HDI – 한국, 그리스, 스페인, 이태리 “2014 Human Development Report Summary”. In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2014. pp. 21–25. Retrieved 27 July 2014. 인도 -"Human Development in India: Costs of Inequality". in International Policy Centre for Inclusive Growth,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Retrieved 2 January 2015 ; 인구 한국,  –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시도편 : 2013-2040, 통계표명 : 지역별 인구 및 인구밀도 ; 케랄라 종교 분포 - "Population by religious communities – Census of India".  Retrieved 12 April 2009. 6) Ray, Suranjita. 2010, "Khap Panchayats: Reinforcing Caste Hierarchies" in MAINSTREAM, VOL XLVIII, NO 30, JULY 17, 2010.

Date 2021.12.0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9778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현장 : 지극히 편파적인 시상식, 레드 어워드 10주년의 현장 >>>> 업로드 준비중 <<<<<<

Date 2021.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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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사람 : 질문을 품은 아나키스트,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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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사람 : 질문을 품은 아나키스트, 이현우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12.01 | 추천 0 | 조회 10330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사람 : 질문을 품은 아나키스트, 이현우 안보영, 적야, 정상천 편집위원 해고자에서 활동가로, 그리고 나은 사회를 위해 공부하는 아나키스트 이현우 동지를 만났습니다.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게 타당한가? 노동하는 자가 노동자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에게 이 물음은 활동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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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5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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