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39호]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 미래에서 온 편지 39호(2021.11.)
□ 특집 : 물신세계의 비참
강연 : 김규항 칼럼니스트
정리 : 이용규 편집위원
<혁명노트>라는 책에서 중심 화두로 ‘물신성’을 얘기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상황이 일어났다. 물신성이 뭐냐는 물음이 쏟아진 것이다. <자본론>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부분은 ‘상품과 화폐’ 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르크스 본인이 어렵다고 한 부분이다. 그런데 ‘물신성, 물신 숭배’ 부분이 더 어렵다. <혁명노트>에서 물신성의 정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을 받게 되었다.
(옮긴이 주: 카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 제1권의 1장은 상품과 화폐의 형태와 가치를 설명한다. 경제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부분이라 다른 부분보다 읽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물신성’이란 ‘상품물신성Commodity Fetishism’이란 말로 1장 제4절에서 처음 등장한다. 김규항 작가는 2020년 출간한 <혁명노트>에서 물신성을 주된 화두로 삼았다. 김규항 작가는 강연 전반에서 같은 책의 이름을 <자본론>과 <자본>으로 섞어서 언급했으며, 여기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본론>으로 적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세계는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상품이 아닌 것이 없으며,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임노동으로 산다. 직장 생활도 내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왜 이런 세상이 만들어졌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분업 체계의 형성
애덤 스미스는 ‘교환’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정의했다. <맨큐의 경제학>의 경제학 10대 원리에서는, ‘교환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적혀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합리적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이런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게 된 이유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 사회가 유지되려면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물질적 재생산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물품이 적절히 생산되고 적절히 분배되어야 하고, 이것이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달리 말하면, 노동이 적절히 배분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사회든지 공통적인 것이다. 봉건 사회에는 공동체의 질서가 있었다. 생산하는 계급이 따로 있고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소비하는 계급이란, 역할 분담이 있었으며 그것이 전통적 질서로 이어지고 반복되었다. 누가 뭘 얼마나 생산하는지의 문제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근데 이것은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해체되었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었다. 사적 소유권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기본이다. 누가 무엇을 생산하고 갖는지의 문제를 관여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고도의 분업체계가 형성되었다. 농경사회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많아지고, 생산력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산자들이 특정한 생산 물품의 생산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회적 분업체계가 형성되었다.
사회적 분업체계의 유지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유지되는가. 사적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이란 개인이냐 집단이냐의 구분이 아니라, 사적인 이해만을 생각하며 생산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생산자’란 기업의 형태다. 사적 이익만 생각하며 생산하는 생산자들이란 것이다. 사회에 이것이 어떻게 분배되고 사용되는지 생각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생산을 전담하는데, 사회적 분업체계는 어떻게 유지되는 것인가. 사적인 노동이 어떻게 사회적 차원의 노동이 되는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이를 -훌륭하게는 아니더라도-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있다. 그것은 모든 생산자들이 자기 생산물을 시장에 들고 나와서 교환하는 것이다. 노동 생산물을 상품의 형태로 교환하는 것이 이 사회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상품은 사용가치가 전부 다르지 않나? 상품이 교환가치가 있다는 것은 사용가치가 생산자가 아니라 남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교환이 가능하다. 모든 노동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로 교환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수많은 상품들이, 사용가치가 다 다른 상품들이, 어떻게 일정한 어떤 규칙 기준을 갖고 교환될 수 있는가. 그 기준이 바로 가치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이 가치는 바로 ‘사용가치가 다른 수많은 상품들이 교환가치를 갖게 하는 어떤 기준’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싸거나 비싸다는 말은, 대개는 그 상품이 가진 가치에 비해서 싸다, 비싸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상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가치를 구입한다는 것이다. 가격을 지불하고 물을 수 있다: 현재 이 가치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사용가치다. 이를 만드는 것이 노동이다. 용접노동이든 재봉노동이든 노동은 전부 관련성이 있지도 않고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을 유용노동이라고 한다. 유용노동의 차이를 제거하고, 모든 노동은 인간의 뇌, 신경, 근육의 작용을 제출한 동등한 것이라고, 동등성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추상적 인간 노동’이다. 노동, 즉 상품의 가치라는 것은 바로 추상적 노동이고 그것의 응고물이다.
노동가치에 대한 큰 오해가 있다. 노동가치론을 얘기하면, 자본가의 혁신 정신, 기업가 정신, 창의성 등이 배제된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노동가치론을 마르크스가 만든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같은 경제학의 시조가 만든 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는 노동이다’란 개념을 규명하거나 주장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물론 고전파의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재정립했다. 그 차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재생산이 어떻게 가능한 사회가 되었나’를 해명하는 데 있었다.
상품이 적정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는 것은, 이 상품에 투입된 노동이 사회적 노동의 일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분업체계의 한 요소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투입되었다고 바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로 확인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리하여 이 상품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통해 사적 노동이 이루어진다. 이 방식이 수반하는 특별한 현상,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려고 하는 물신숭배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 앞에 자립하는 상품
물신숭배라는 말은 원래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상들이 만든 말이라고 한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미개한 종교나 행동, 나무나 돌 같은 데 절을 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비웃는 차원에서 ‘페티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마르크스는 그 말을 자본주의적 몽상에 사용한 것이다. 우리가 근대적, 계몽된 인간이란 자부에 차 있지만 우리야말로 제대로 된 물신숭배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적 생산자들은 인격적 주체로서 관계하며 교환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산물은 교환을 통해 비로소 연결된다. 인간들의 사회관계가 상품들의 사회관계로 뒤집혀서 나타난다. 얼마 전 고등학교 교사 친구가 말해준 에피소드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노동의 소중함에 대해 말을 했다고 한다. 농부의 노동 덕에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버스 기사의 노동 덕에 학교에 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본인은 생각이 다르다고 했다고 한다. 왜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느냐, 우리가 그들의 노동을 구매하니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친구는 그 말에 반감이 들었지만 논리적으로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상품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 대체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이 부분이다. 시장에서 쌀을 샀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농산물과 내 화폐의 관계이지, 농부와 나의 관계는 아니다.
가치라는 것은 결국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물신숭배는 이것을 상품 자체의 속성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건 거부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를테면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일정한 가격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다 보니, 그것은 당연히 그 상품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생산자들도 계속 경쟁 상태에 놓여 있고, 뒤처지면 파산하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시장에서 계속 변동되기 때문에 이를 촉각을 곤두세워 살피고 예측해야 한다. 예측한다고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자본가들은 이를 두고, 마치 자신들이 경제적 주체로서 사물들의 운동을 분석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사물들의 운동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치’가 동등한 인간 노동의 추상적인 응고물이라는 생각,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가 가려져 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고 할 틈도 없고 할 겨를도 없다. 기업가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딴소리하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노예와 같다. 성공을 했다는 것은 주인의 기분과 의사에 부응했다는 뜻이 된다. 상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 앞에 자립하고, 자신들끼리, 그리고 인간과 관계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고 인간은 숭배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상품물신숭배를 종교에 비유한다.
이 말이 우리에게 쏙 와 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상품을 상품으로 교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 가치형태인 화폐를 사용한다. 상품 물신숭배는 화폐의 물신숭배의 형태로 본격화하고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독특한 상황이다. 이를테면 유럽의 봉건제에서, 농노가 일주일에 3일 노동했다면 그 3일이 자기 노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수탈하는 영주도 자신이 사용하는 생산물이 누가 만든 것이라는 걸 안다. 생산물들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대체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신숭배는 환상이다’라는 표현의 뉘앙스를 오해할 수 있다. ‘환상’이란 말은 자본론 원전에서 ‘Phantasmagoric’이란 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에서 유행했던 환등쇼(판타스마고리, Phantasmagorie)를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구조가 은폐된다는 말에 가깝다. 자본주의적 구조가 은폐된 상태로 멀쩡한 세계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천동설 같은 건데, 옛날 사람들은 실제로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망상이 아니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객관적 실재였다.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구분해야 한다. 단지 망상이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모든 사고 체계가 객관적, 합리적으로 돌아가니까. 물신숭배라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물신숭배를 전제하는 사회
물신숭배라는 현상의 뿌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제학이다.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는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로 나타난다고 분명히 규명했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차원까지는 가지 못했고 그 작업을 마르크스가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경제학은 소위 말하는 ‘효용가치론’이다. 효용이라는 것은 사용가치와도 다르다.
사용가치는 그 상품 자체가 가진 그 자연적 속성이다. 탁자는 무언가를 올려놓거나 먹을 것을 퍼먹을 수 있는 식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것이다. 이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효용은 사용가치에 대한 한 인간의 주관적 욕구와 충족도를 얘기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주관적이고,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다르고 한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상품들에 대한 효용성은 또 다르다. 그래서 효용은 가치가 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현대 경제학을 그래서 ‘속류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경제학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좌파는, 그것을 그들이 가치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대 경제학의 관심은 가격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생산, 유통, 소비로 나누어진다면 지금 경제학은 유통만을 얘기한다. 시장 구매와 판매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품 설계의 본질과 구조에는 관심이 없고 상품의 설계, 현상, 형태, 그 인과관계만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경제학이다.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관심은 그런 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보다 ‘시장경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시장경제를 분석하는 틀의 가장 핵심은 역시 구매와 판매, 유통과 관련된 수요와 공급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가치가 노동이라는 것까진 고려했는데, 지금은 아예 가격에만 관심을 갖는다. 물신숭배를 아예 전제하고, 거기에 기반한 경제학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제도의 기본 틀은 무엇인가. 모든 상품 수요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교환하는 관계라는 전제다. 빈곤, 양극화,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그것은 좀 애석하지만 이 사회의 기본 틀 자체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기가 소유한 상품을 교환하는 관계에 있으며 그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계급 사회’라거나 ‘자본주의 이윤의 원천은 잉여가치 착취’라는 식의 얘기는 사실은 이미 처음부터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 법-제도와 연결되어 우리의 상식, 학문, 종교, 문화가 ‘상부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다.
노동은 물신숭배를 통해서 어떻게 바뀌는가
물신숭배가 만들어지는 문제, 거기서도 근본적인 얘기를 할 것이다. 노동은 물신숭배를 통해 어떻게 바뀌는가.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상품의 가치란 기준을 통해 교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른 유형의 노동-인간의 노동-이 사실 동등하다는 ‘추상적 인간 노동’이라는 개념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을 살펴봤다. 그리고 분업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동등하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모든 노동은 의존적이고 서로 돕는 관계다. 이것이 분업사회의 원리다.
그런데 가치가 상품 자체의 속성이라고 보게 되면 노동은 개별적인 것이고 경쟁관계에 있게 된다. 노동력 가격의 차이가 나는 것은 그래서 합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귀천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모든 사람들의 능력과 노력의 합리적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 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이것이 고상하거나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그것이 동등하기에 분업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노동에 차등이 있다면 분업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분업이 성립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그 동등성이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동등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신숭배를 통해서 이 동등성이 은폐된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까 그 선생님보다 그 학생 얘기가 맞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에서는 인간 평등의 정신 같은 것은 여기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의와 평등의 상한선이 바뀐다. 그것이 공정성이다. 경쟁의 공정성. 공정하기만 하면 차등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능력주의’를 ‘조금 오래된 좌파’들이 아주 개탄하는데, 이것은 비판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경쟁의 공정성이라는 것이 정의의 상한선으로 짜여진 사회에서 노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가. 오히려 미안해해야 한다. 정의의 상한선을 그렇게 고착시킨 사회를 만든 우리가 미안해할 일이다.
물신숭배는 자본의 운동과 폭주를 근본적으로 제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노동과 생태의 위기가 동시에 다가오는, 자본주의 말기에 이른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닥쳐오는 오늘날 위기의 근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상품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품교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사회가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물들과 상품의 형태로 관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물신숭배, 그 비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
노동당이 ‘정권이 아니라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체제를 전환한다는 것은, 분배 차원에서 재분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체제가 바뀐다는 것은 생산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 없다. 생산 영역은 건들지 않는다. 재분배의 문제는 체제 전환의 중간 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좌파들은 그것을 거의 최종적 목적으로 여기는 추세다. 또 시민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리버럴 정치세력에 동조하는 식의 노선을 타고 있다. 혹은, 이것은 안타까운 얘기지만 ‘좌익자선운동’이라고 나는 칭한다. 동정심을 사려는 운동들, 인간이 이렇게 처참해서 되겠느냐,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부각해서 시민의 관심을 확보하는 운동들. 이것이 주축이 되면 이것은 자선운동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변혁운동의 논변을 지닌 것이 아니라, 현 체제 안의 ‘불쌍한 사람 돕기’를 좌파가 도맡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이것을 대중 노선으로 삼고, 계속 패퇴하고 세력이 약해지고 궁지로 몰리는 악순환이 큰 흐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론>이라는 책에 대해서, 우리가 두 가지의 단점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옛날에 읽었다. 또 하나는 날아갔다는 것이다.
‘읽었다’는 말은, 우리가 옛날에 자본론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론으로서 전적으로 부정한다.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읽었다’는 전제가 너무 큰 질병을 만들었다. 이론적으로, 사상적으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날아갔다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아니다. 재벌 독점자본과 국가가 결합한 계획경제다. 국가를 통해 시장을 장악하고 시장의 불안정성이나 위험을 통제해 가며 중소기업을 하청계열로 착취해가며 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자본주의다.
이런 것은 마르크스 당대에는 없었고 <자본론>에 나오지도 않는다. 이 책이 낡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몫이 남은 것일 뿐이다. 다만 지금 형태의 자본주의든 19세기의 그것이든 무관하게, 이 시스템의 본질적인 작동원리, 법칙에 대하여 분명히 해명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오늘날의 독점자본주의는 우리의 몫이다.
월가의 엘리트들은 2008년 공황 이후에 <자본>을 진지하게 읽었다. 이들이 보니, 경제학은 가격만 얘기하는 경제학이고, 더욱이 실물경제를 떠나 금융과 경제가 별개로 돌아가는 이상한 경제다.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엎어지는 이유를 해명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부에서 찾을 수가 없는데 <자본론>이 그걸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은 다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을 잘 파악해서 거기서 ‘대박’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다만 목적이나 시대를 불문하는 자본의 어떤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상품 물신숭배와 그 비밀을, 다시 한 번 겸손한 태도로 해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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