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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특집 :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특집 :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특집 :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0 | 조회 2661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특집 :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김현우 동지 강연 정리 1.5도 티핑포인트  '1.5도 티핑포인트'라는 개념이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지구 평균 기온이 1도 정도 상승했다. 그런데 0.5도 더 상승하면 임계점이 넘어가서 온난화와 기후 변화가 더욱 크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만 년 전부터 기후 변화의 폭을 보면 섭씨 평균 8~10도 정도다. 기온이 낮을 때는 빙하기, 높을 때는 간빙기라 하는데 지금은 간빙기보다도 온도가 높다. 온도 변화에서 중요한 건 변화의 속도다. 몇만 년 동안 변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200년 동안 1도가 변했다는 것은 생태계에 대단한 충격이다.  10만 년 전부터 현생인류가 지구상에 살았다. 현생인류는 우리와 같은 유전자와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렵 채집 생활을 한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지구 온도가 낮아 기후가 열악했기 때문이다. 12,000년 전부터 기온이 올라가면서 꾸준히 온화한 기온이 유지되고 있다.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해 지금과 같은 대륙 모양이 생겨났다. 빙하가 녹은 물이 비옥한 땅, 이를테면 삼각주를 형성했다. 농경 생활의 시작을 추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현생 인류가 전세계에 지금 같은 문명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을 신생대 제4기 가운데 충적세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충적 평야가 생겨난 까닭이다.  한데 지금의 온화한 기온이 산업혁명 이후 급상승하고 있다. 또 이산화탄소 농도가 따라 상승하고, 온실효과를 만들고 있다. 산업혁명 시작 시기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260PPM이었으나 지금은 410PPM으로 늘어났다. 인류세, 인터스텔라를 초래할 것인가  지질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생물종의 큰 변화다. 생물종의 95% 이상이 사멸하는 '대멸종'은 대개 기온 변화가 초래했다. 일군의 대기화학자들은 지금이 '충적세'를 넘어선 '인류세'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1945년 7월 16일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부류의 과학자들이 있다. 미국 사막에서 핵폭발 실험이 최초로 이루어진 날이다. 그 이후 지층을 조사하니 세늄 137이나 스트론튬 같은 인위적 방사능이 발견되었다. 인간이 새로운 원소를 지층에 새겨 넣은 것이다. 또 플라스틱, 인간이 만든 고분자 화합물 역시 지층에 새겨져 있다. 한반도를 집중 조사하면 '닭뼈'가 엄청나게 발견된다. 닭을 엄청나게 소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물종을 멸종시킬 뿐 아니라 개체 수도 늘려놓고 있다. 지구상 포유동물의 총 무게 가운데 인간이 차지하는 무게는 36% 정도로 추정된다. 나머지에서 60%는 인간이 기르는 가축이다. 나머지 4%만이 야생 포유류의 총 무게다. 60%의 가축 중에는 50억 마리의 소가 있다. 인간이 생물종을 그만큼 크게 바꿔 놓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메탄가스 등이 기후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인류세'라고 칭함이 당연하다.  그리고 인류세의 가장 큰 특징과 결과는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의 증가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대멸종을 불러올지 모른다.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는 미증유의 일이 될 것이다.  날씨가 온화해지는 것만이 기후 변화는 아니다. 북극권이 더워지면 시베리아의 제트기류가 느슨해지고, 그것이 중위도로 내려와 서울을 춥게 만든다. 지구 온난화는 기후 격변을 의미한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날이 늘어나고 자연재해의 예측도 불가능해진다. <설국열차>나 <투모로우> 영화처럼 하루이틀 사이에 지구 전체가 빙하가 되지 않는다. 가장 비슷한 영화는 <인터스텔라>다. 가뭄과 병충해에 강한 옥수수만 재배하고, 시민들이 공장에서 의무 노동을 하고, 야구경기 중 모래폭풍이 불어 닥치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물론 오늘처럼 맑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일상적인 나쁜 날씨가 너무 길게, 예기치 못하게 올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뉴 노멀'과도 같다.  시리아의 난민 문제도 기후변화가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기후 변화로 러시아 밀 재배에 흉작이 들어 밀 가격이 올랐다. 주민들의 자생력이 없어졌다. 종족 간의 분쟁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근본주의가 득세하고 이를 피해 난민들이 유럽으로 몰려들었다. 유럽에서는 이들 때문에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환경 문제로 녹색당이 득세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삶터를 잃고 난민이 된 것이 기후 난민이다. 1년에 2,500만명 정도의 기후 난민이 발생한다. 이렇게 정치적 변화도 연관이 크다.  '티핑포인트'를 넘어가면 인터스텔라의 나날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떠한 사회, 동네, 정부인가.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기후 회의론  기후변화에서 확실한 것은 탄소 농도가 증가할 것이라는 것 뿐이다. 화석연료를 채굴해서 연소시키면 탄소 농도가 증가할 것이다. 그런데 이산화탄소 농도가 440~450PPM이 되면 얼마나 온도가 상승할지 불확실하다. 북극, 남극이 얼음으로 덮여 있을 때는 태양빛을 반사하지만, 검은 바다가 되면 열을 흡수할 것이다. 시베리아의 동토층에는 엄청난 메탄이 묻혀 있는데 빙하가 녹으면 이것이 드러난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10배 이상의 속도로 온실효과를 촉진한다. 그나마 탄소를 흡수하는 것이 숲인데, 온도가 올라가니 큰 산불이 빈발하여 숲이 없어진다. 바다가 지닌 이산화탄소가 공기중으로 방출된다. 빙하도 천천히 녹지 않고 '찢어지듯' 녹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과학자들의 예측 모델에 아직 반영되지 않았다. 해수면, 바람, 온도 등의 변수가 너무 많다. 그리고 이러한 물리적인 변화가 어떤 사회의 변동을 가져올 것인가? 이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인과관계와 경향은 분명하다. 대응하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도 확실하다.  왜 대부분의 정부에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고 세인들의 인식도 미비한가? 대응의 효과가 불확실하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또 보통 사람들의 인식 프레임 바깥에 있는 문제다. 생산 방식, 소비 방식을 바꿔야 한다. 기후 변화를 막으려면 'everything'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한 행동'이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이론, 지식뿐 아니라 심리학과 정치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전형적인 기후 회의론이 두 개 있다. 먼저 전세계 7위의 온실가스 다배출국이지만 비율로 보면 2%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미국, 중국에 비해 무의미하며 우리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수출 경쟁력만 깎는 일이란 것이다. 또 티핑포인트 역시 이미 넘어섰고, 이 흐름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반박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루아침에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몇십년 동안 만성적인 고통, 준전시, 비상사태가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듯 그런 경우에는 가장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본다. 어떻게 하면 혼란과 고통의 상황을 가급적 예방하거나 연대를 통해서 막아내고, 더 나은 삶으로 이어나갈 기회로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찰해야 한다. 감내할 고통  2050년 온실가스를 '제로'로 만드는 것이 전세계적 목표다. 역사적으로 큰 경제 사회 위기 때 에너지 소비가 줄었다. 스페인 독감, 대공황... 그러나 그 위기가 끝나면 배출량이 늘었다. 그리고 1950~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에너지 소비가 늘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생산과 소비가 늘었기 때문이다. 석유파동 두 차례 때 줄었다가 또다시 늘었다. 2000년대 국제 금융위기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코로나 사태로 5~10% 정도 줄었다. 2050년 온실가스를 '제로'로 만들려면 지속적으로 이런 흐름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 에너지 소비량이 14% 줄었던 적이 있다. 1998년 IMF 시기다. 경제성장률이 -5.2%였던 시기다.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가 정리해고당하고, 자살이 속출하는 정도로 경기가 위축되어야 14%다. 코로나 상황이 계속되거나 외환위기 정도 충격을 20년 동안 감수해야 가능한 수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국가들이 소비와 경기부양으로 코로나 시대의 해결책을 내고 있다. 다른 한편 코로나 사태는 리허설이기도 하다. 어떻게 불필요한 이동, 생산,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으며 공기 질을 높이고 삶을 쾌적하게 만들 수 있을지 힌트를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린뉴딜' 얘기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예산을 제일 많이 쓰는 것은 전기차, 수소차 보급 지원이다. 이를 보급하면 온실가스가 줄어드는가? 아니다. 가솔린과 디젤 차량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세컨드카가 되고 있다. 또 결국 석탄, 석유에서 나오는 전기를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탄소세 도입이나 전기요금 인상 따위는 다음 정부로 넘겼다.  그럼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진단하고 대안을 강구할 것인가? 마르크스의 시대에 자연환경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공기, 물 땅은 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태사회주의자들의 최근 주장은 다르다. 자연과 생산조건들이 점점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한계로 작용한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 뿐 아니라 생산 조건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더 크게 일어날 것이다. 자본주의의 2차 모순이라고 일컫는다. 기후위기는 체제의 문제다  어떤 학자들은 '자본세'를 얘기한다. 인류가 아닌 자본주의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자본주의 이전엔 그렇지 않았는가? 순환경제였기 때문이다. 유지하면서 나눠 쓰는 경제. 봉건제까지는 노비는 착취를 당했지만 체제가 생태계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고농도의 화석연료를 태우는 '편리한' 활동이 기후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생물종을 위계화하고 자연과 다른 종을 착취, 남용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의 문제, 산업주의의 문제가 닿는다. 그랬을 때 해결 주체의 관계 문제도 노동운동, 페미니즘 운동과 맺어야 한다. 기후위기가 자본주의 한계 내에서 해결이 가능한가? 자본주의 안에서 전세계적 통치권력이 가능하다는 이론이 '기후 리바이어던'이다. 유엔 협약같은 국제 레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잘 안 된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그대로 두고 세계가 따를 수 있는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소고기의 문제는 유엔 기후변화 어젠다에 들어가지 않는다. 미국인에게 햄버거는 영혼 그 자체이니까. 반자본주의 모델 '기후 마오'는 어떤가? 중국은 군대와 당이 나서서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 다만 이것은 동아시아에서만 가능한 모델이라고 본다. 동원이 가능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과 전환의 큰 전제로서 '탈성장'이 필요하다. 이윤을 위한 확대재생산이 탄소 순환의 균형을 깨트린 것이므로, 경제의 확장을 전제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  탈성장은 반성장과 다르다. 이미 인류의 생산 총량은 충분히 분배와 복지에 필요한 양에 도달했다. 수단으로서 참여적 계획경제, 자립과 살림의 확대, 연대와 민주주의 3가지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국가적 자원 배분과 규제가 필요하다. 지금도 수단은 많다. 기업을 압박하는 정부가 선진국, 강대국에 많아질수록 좋다. 국가적 참여적 계획경제, 그리고 자립과 살림의 일상화가 지역에서 일어나고 그것을 연대민주주의로 확대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것을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녹색 새마을 운동'이라고 일컫는다. 일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했던 것이 지금 필요한 것과 다르지 않다. 도농의 역할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고 당시 국가 예산에서 새마을 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정도로 컸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데는 이만큼의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기획원 수준의 역할을 할 정부기구가 필요하고, 여기에 부응해 개헌도 필요하다. 국회와 별도의 기후시민위원회도 필요하다. 우리가 벌여왔던 기후농민운동, 기후도시운동, 기후생협운동 등도 빠질 수 없다.  사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국가들은 거의 제로성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이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통념들. 식량 민주주의 주거 에너지 교육 같은 것들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장의 자동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생산을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균형이 깨어진다. 질소와 인의 축적, 생물종 다양성 파괴, 오존층 파괴 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정부정책과 계획,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은 축구보단 야구에 가깝다. 9회 말, 10회 말, 20회 말... 한국은 정부정책이든 기후 운동의 상황이든 2회 초에서 2회 말 정도의 상황이다. 아직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궤도에 오르면 발전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연대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는 2회, 3회를 준비해야 한다.

Date 2021.06.26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4 | 조회 2705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역사 : 경성의 재발견 경성의 재발견 01 - 노동자의 도시, 경성 현린  복고가 대세라고 합니다. [써니](2011), [건축학개론](2012), [응답하라 1997](2012) 등을 통해 주로 1980~90년대를 겨냥하던 이른바 ‘레트로retro’ 또는 ‘뉴트로newtro’ 경향은, [암살](2015), [덕혜옹주](2016), [미스터 션샤인](2018) 등과 함께 이제는 1920~30년대 전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50년 전은 물론이고 100년 전의 의상과 소품, 건축까지 영화 세트나 사진 스튜디오를 벗어나 골목으로, 일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고 경향 속에서,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를 살아냈던 사람들의 자취는 그들이 걸었던 길과 함께 지워지곤 합니다.  복고의 소비는, 그 시대를 이미 경험한 세대에게는 향수와 그리움을, 그 시대를 처음 경험하는 세대에게는 낯섦과 놀라움을 선사한다고 하죠. 너무 빠른 속도의 변화에 지쳐 있는 현대인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소비하며 안정감을 느낀답니다. 게다가 복고 문화의 소비는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에 필요한 특별한 배경과 소품을 마련해 줍니다. 100년 전 경성의 ‘모던보이’나 ‘모던걸’의 의상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도착한 ‘다방’에 앉아 ‘가베’를 마시는 ‘경성레트로’도 그 중 하나입니다.  가까운 과거로의 복고와 달리, 경성레트로는 세대와 세대 사이가 아니라 해방을 경계로 시대와 시대 사이를 뛰어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시대에 태어난 우리가 경성레트로를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경성레트로가 담고 있는 민족주의 서사에 우리가 이미 친숙한 탓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감각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한 당시의 경성스타일은, 개방 이후 경성에 들어오기 시작한 국제 문물의 매력과 더불어 식민지 시대라는 현실과는 모순적인 민족주의적 긍지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경성의 실제는 결코 친숙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1920년 경성에는 이미 400여개의 공장이 있었고 이는 10년 뒤 1300여개로 늘어납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경성으로 모이기 시작하고, 이들 새로운 노동자 대부분은 신당동, 아현동, 홍제동 등 도성 밖 공동묘지나 국유지에 토막을 짓고 삽니다. 1920년 25만 여명이었던 경성 인구는 1929년에는 34만으로 늘어나는데, 대부분이 토막민이었을 경성 외곽 인구가 14만이었다고 하니, 당시 실상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경성 공장의 절대 다수는 일본 자본 소유의, 일본 시장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공장에서는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가 함께 일했지만, 조선인 성인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이 되지 않았고, 조선인 성인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다시 조선인 성인남성 임금의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의 절반 정도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했고, 특히 방직공장 노동자는 80% 이상이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고 받은 임금은 가족들의 한 끼 식사를 준비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반인간적 착취에 맞서 투쟁을 선도한 것은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이었습니다. 경성에 산재해 있던 신발, 양말, 방직 등 경공업 사업장에서 시작된 투쟁은 점차 지역별, 직종별 투쟁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예컨대, 1923년 7월 3일, 광화문 인근의 네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이 삭감된 임금의 정상화를 요구하며 동맹파업에 돌입합니다. 이 파업은 경성의 양말직공조합, 인쇄직공친목회, 양화직공조합 작업부 등 조선노동연맹회 소속 단체와 시민사회는 물론이고 일본 오사카의 조선노동동맹회의 연대에까지 힘입어 열흘 만에 승리합니다. 1923 경성고무 연대파업에 들어간 여공들이 1923년 7월 3일 각황사(현재 조계사 옆)에 모여 토론중이다.(동아일보 1923년 7월 5일자)    노동자들의 도시 경성, 산업도시 경성은, 복고 경성과는 다른 서사와 스타일의 도시입니다. 이후 민족은 해방됐으나 노동자는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공장과 토막을 허문 자리에 쇼핑몰과 아파트를 세우며, 인구 25만의 경성은 인구 1천만의 서울로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100년 전 경성은, 우리들 골목과 일상 어느 한편에 버려지고 숨겨지고 지워졌습니다. 이제 이 지워진 경성을 찾아 길을 떠나려 합니다. 다시 찾은 경성은, 그러나 기대한 것 이상으로 불온하고 또한 투박할지 모릅니다.

Date 2021.06.26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정세 : 6월의 정세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정세 : 6월의 정세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정세 : 6월의 정세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1 | 조회 2519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정세 : 6월의 정세 정세 (2) - ‘국가의 귀환’이 가리고 있는 것들 김석정  2020년 시작과 함께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많은 익숙한 것들과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았던 것들을 바꾸어 놓았고,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또한, 리오데자네이로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만든 미국의 허리케인과도 같은 의외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직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지난 일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지식은 늘어났으며,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방백신과 치료제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어떤 방역체계가 잘 작동하는지 아닌 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경험들도 쌓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 바이러스의 창궐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하는 점에 대한 단초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몇 회에 걸쳐 이러한 단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가 돌아왔다.  ‘돌아옴’, ‘귀환’은 ‘사건’이다. 우리가 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그날의 일과 후에 돌아오는 일을 귀환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귀환에는 극적인 요소가 개입한다. 만약, 그날의 일과 중에 붕괴된 다리를 건넜거나, 백화점에 들렀다가 왔거나 아니면 심지어 근처 도시에 출장이라도 갔어야 ‘돌아왔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국가’는 존재하였지만 부재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행위하였지만 행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국가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그 행위를 볼 수 있다. 이 ‘돌아옴’을 추동한 ‘사건’은 물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확산이다.  모두 알다시피 지난 몇 십 년 간 주된 추세는 국가를 소거하는 것이었다. 주요한 행위 주체로서의 국가가 ‘민간’에 그 권리와 의무를 하나 씩 넘기며, 권력은 국제적인 자본들과 각국의 독점자본들에게 이양되고 있었다. 국제적 자본이 구축한 지구적 자본주의는 초국적으로 상품과 자본이 움직일 수 있도록 세계를 연결하였고, 그렇게 연결된 세계에서 개별 국가들은 더 이상 주요한 행위의 주체가 아닌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확산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며 국가는 할 일이 많아져, 요즘말로 열일하고 있다. 물론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고, 그에 따라 개입의 정도는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방역 과정의 통제, 국경의 통제 및 경내의 경제 활동에 대한 지원에서 국가가 잘 보인다. 그러면, 우리에게 돌아온 국가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가장 먼저, 우리의 국가는 정치가 없이 돌아왔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국가, 그리고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 대책들에서 보이는 국가는 사실 행정적인 국가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정의 측면에서 확실히 국가는 선도적으로 각종 조치를 시행하고 이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그 바탕이 되어야 할 정치는 아직도 실종 상태에 가깝다. 결국, ‘정치 없는 행정’은 기존의 체제에서 가장 우위를 점했던 기득권 자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 만을 할 수 밖에 없다.  또, ‘귀환’의 계기가 전반적인 구조의 변화나 그러한 변화에 대한 성찰에 기반하지 않은 만큼, 우리의 국가는 변화하지 않고 돌아왔다. 이미 2019년 하반기에 주요국의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각국이 전통적 처방으로 돌파하려는 때에 바이러스의 대확산으로 인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적으로 선진산업국들은 ‘더욱 커진’ 전통적 처방인 기업에 대한 거대한 유동성 지원과 인민들에 대한 소득보전 – 실업방지에 초점을 맞춘 정책들을 내놓았다. 다만, 기업에 대한 유동성 지원에는 이전에는 없던 단서 조항들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우리의 경우, 국가행정이 전면에 재등장하고, 각종 방역과 경제에 대한 대책들을 내놓기는 하지만 실제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지난 1년여 동안 드러난 태부족인 공공의료의 부족, 택배-배달업에서의 과로사, 끊임없이 발생하는 각종 산업재해, 사회적으로 거리 두어져 버린 노인들과 장애인, 더욱 차가워진 시선을 느끼는 이주민들, 등등의 문제는 아직도 제대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더욱 드러나고 사회적 논의가 되기는커녕 방역이라는 주제 뒤로 가려 버리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다시 정치를 세우는 일이다. 최소한,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대확산이라는 사건은 자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줬고, 그에 따라 국가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계기를 맞아 우리는 정치를 조직하여, 사회 속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동력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의제들은 이 시기에 공공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선, 교통 – 통신 – 에너지 분야에서 다양한 수준의 공적 소유의 확대를 고려할 수 있다. 이 분야들은 대자본이 투하되고 모든 인민들의 일상적 삶에 필수적으로 관계되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기에 공적 소유로 전환하는 경우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고 개선의 효과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에너지 –분야에서의 공적 소유 확대는 화석연료에서 탈피하여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촉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높임과 함께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과도기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또한, 교육 – 의료(및 요양) - 주거 분야의 경우 우선 공적 운영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분야들 역시 공적 소유를 확대해 나가야 하겠지만, 많은 수의 서비스 제공자가 존재하고 있는 만큼 공적 운영을 확대하는 동시에 공적 소유를 지속적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임금노동과 특수고용에 대한 보호/통제와 함께 새로 등장하는 플랫폼 노동에 대한 통제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플랫폼 노동의 경우, 아직도 형성 과정에 있으므로 지금이 통제를 시작할 적기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례, 형식에 조사 및 연구를 바탕으로 이러한 노동 형식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여 미래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빈손으로, 옛날 그 차림으로 돌아온 국가이지만 우리의 정치력을 신장시킴으로써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데 복무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Date 2021.06.26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사람 : 청년 전태일 ‘정로빈’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사람 : 청년 전태일 ‘정로빈’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사람 : 청년 전태일 ‘정로빈’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2 | 조회 2410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사람 : 청년 전태일 ‘정로빈’

Date 2021.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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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리뷰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리뷰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리뷰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2 | 조회 2612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리뷰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김혜리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이렇게 다시 내일이 되면 전 또 노오오력을 해야 되겠죠..?" "참 미안하네요...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까지 됐는지, 참..."  이 대화는 소박한 자유인 후지이 모임에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토론하던 중, 휴식 시간에 모임 구성원인 박수영 동지와 나눈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책 내용보다도 위의 대화였다. 박수영 동지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상하고 괴상한 사회를 위로가 바꿀 순 없지만, 난 고마웠다. 늘 불안정한 취준생으로서 생산적인 역할에서 도태됐다는 무의식적 불안감과 압박감에 놓여있지만, 박수영 동지의 말은 정말 큰 힘이 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읽기 전에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았지만, 책을 펼친 후 본 사회 꼬락서니는 개판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철저하게 ‘급’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서울대와 지방대... 이게 끝이 아니다. 더 잘게 쪼개고 쪼갠다. 인기학과와 비인기학과, 정시와 수시, 수시에선 지역 균형과 기회 균형... 저자는 각박하고 힘든 사회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하고 이렇게 ‘적’이 된 이유가 능력주의라고 지적한다.  새삼 놀랐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내가 누굴 걱정해”처럼 청년들이 서로에게 무심한 건 알았다(물론, 이건 ‘청년’만의 문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거리가 너무 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선조차 이렇게 날카로운 줄이야....  위에 말한 토론에 한 친구를 초대했다. 이 친구는 사회 운동이란 단 한번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삶의 열정도 있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청년이다. 모임 전날, 전화가 왔다. 책을 읽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 진짜 고마워... 덕분에, 너무 잘 읽고 있다. 너무 쓰라려서 읽기가 힘들지만, 진짜 너무 잘 읽고 있다.” 취업 준비로 힘들어하던 이 친구는 지금은 취업했지만, 이제는 책들을 끝까지 읽을 여유가 없어졌다. 물리적인 여유든 심리적인 여유든. 왜?  현재 청년들을 바라보는 일부 윗세대의 모습은 더욱 더 개판이었다. 이 책을 읽을 즈음 ‘이십 대 개새끼론’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선 깜짝 놀랐고, 이런 의문이 줄을 이었다. ‘아니 왜 개새끼?’, ‘사회 문제를 ‘이십대’로 한정 짓고 세대의 문제로 돌려?’ ‘개새끼라고 부를 자격이나 돼?’ ‘개새끼라는 명칭을 붙이기 전에, 청년의 모습이 왜 그럴까라는 생각은 해봤어?’ 떠돌이 개  이 책을 읽으면서, 작년 처음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했을 무렵이 떠올랐다. 정말 좌절 또 좌절의 순간들이었다. 기업의 요구에 맞춰서 내가 살아온 행적은 제외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러고나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인간이었다. 이력서와 자소서를 완성할 때 쯤 되니 나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에 선택을 받기 위해선 이윤을 만들어 줄 상품으로서, 나를 포장하고 또 포장해야 한다. 선택받아야 하고 도태되지 않아야 하니깐. 그래서 한참 고민을 했다. 선택받는 애완견이 될 것이냐, 아니면 반항하는 사냥개가 될 것이냐.  그런데, 그냥 나는 떠돌이 개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어차피 자본의 애완견이 될 거면 차라리 나도 1등급, 인서울, 정규직 타이틀을 갖고 싶다. 이 마음은 잘못된 것일까? 미래에 보내는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라고 한 만큼, 나도 먼 훗날 미래의 다음 세대들이 부디 그때는 조금 더 평등한 세상에 살게 되기를.... 내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기를... 앞 세대인 내가 미안해 해야 한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Date 2021.06.26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포토에세이 : 올려다보며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포토에세이 : 올려다보며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포토에세이 : 올려다보며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2 | 조회 2613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포토에세이 : 올려다보며 <작성: 이용규>

Date 2021.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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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편집후기 : 사람을 만나다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편집후기 : 사람을 만나다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 편집후기 : 사람을 만나다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6.26 | 추천 3 | 조회 2661
■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2021.06.) □ 편집후기 : 사람을 만나다 적야    사람을 만나다.  당원을 만난다. “저는 노동당 당원 000입니다”로 시작하는 기관지 '사람'은 당원 영상 인터뷰로 진행된다. 인터뷰를 위해 인터뷰이(interviewee, 인터뷰 받는 사람)를 섭외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노동당에 다양한 활동가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34호에서는 청소년청년위원회를 준비하고 있는 정로빈 당원을 만났다. 작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을 함께 했던 학생 당원이다. 4월 산업재해로 죽음을 맞이한 故 이선호 씨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전태일 다리에서 이동 노동자의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노동당 청년 당원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 현장의 소리를 인터뷰에 담았다.

Date 2021.0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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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1)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5.07 | 추천 4 | 조회 8742
■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2021.05.) □ 복간사 : 다시 쓰는 편지 □ 축사 □ 특집 :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 정세 : 5월의 정세 □ 사람 : 러빙 속초 버닝 속초 ‘김종숙’ □ 리뷰 :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 □ 포토에세이 : C씨의 적당한 식단 ■ 편집위원: 김석정, 나도원, 안보영, 이용규, 적야, 현린

Date 2021.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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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복간사: 다시 쓰는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복간사: 다시 쓰는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복간사: 다시 쓰는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5.07 | 추천 3 | 조회 1901
■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2021.05.) □ 복간사: 다시 쓰는 편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를 다시 씁니다. 2016년 6월 32호 이후 5년 만의 복간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를 다시 쓴다는 것은 자본주의 너머 사회주의를 향한 노동당의 사유를 다시 모아 내고 실천을 이어 간다는 것입니다. 끊어졌던 편지를 다시 쓴다는 것은 끊어졌던 선을 다시 잇는다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던 점들을 이어 다시 광장을 연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쓸모 없다며 사회주의라는 과거를 폐기하지만, 불가능하다며 사회주의라는 미래를 포기하지만, 그리하여 자본주의라는 반인간적, 반민주적, 반사회적 체제 속에 안주하지만, 노동당은 다릅니다. 노동당은 다른 시간에 대한 사유를 놓지 않습니다. 노동당은 다른 공간을 위한 실천을 놓지 않습니다.   선이 끊어질 때, 점들은 고립되고 마침내 소멸합니다. 반면에 선을 이어갈 때, 점들은 면으로, 공간으로 확장합니다. 당원과 당원 사이의 선, 지역과 지역 사이의 선, 당 안과 밖 사이의 선,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와 현재 사이의 선들을 이어 활성화할 때, 노동당의 광장 또한 다시 열리고 다시 확장해 갈 것입니다.   어려운 조건이지만, 김석정, 나도원, 안보영, 이용규, 적야, 현린 6인의 편집위원이 우선 시작합니다. 이갑용, 임수태, 홍세화 고문과 김일규, 김종숙 동지를 비롯한 당원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미래에서 온 편지] 복간호인 33호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당원 동지들이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현린 노동당 대표

Date 2021.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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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축사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축사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축사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5.07 | 추천 0 | 조회 1368
■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2021.05.) □ 축사 홍세화 고문    안녕하세요?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의 복간 첫 호(온라인) 발간을 당원 여러분과 함께 축하합니다. 미래는 기어이 우리에게 도래한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우리의 사유와 실천을 세상에 알리는 장으로, 또한 우리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는 텃밭으로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조직하라, 학습하라, 선전(홍보)하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시들 수 없는 명제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다시 끌어 올리려고 신들메를 동여 매는 마음가짐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와 함께 하기 바랍니다. 임수태 고문    ‘미래에서 온 편지’가 복간된다니 기쁩니다. 기관지가 당원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침체된 당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활력소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관지를 통해 우리를 내외에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갈수록 심해 지는 불평등과 환경 파괴, 기후 위기 등은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경고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공당은 우리 노동당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 노동당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관지가 우리 노동당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갑용 고문    노동당 기관지 복간을 바라 보며, 당대표 시절 '미래에서 온 편지'를 폐간하면서 소중한 자료이며 자랑이 될 기관지를 재정 문제로 폐간을 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담겨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 한 권이라도 더 살리려고 사용하지 않는 복도에 보관을 했습니다. 그러다 당사를 줄이며 책들마저도 둘 공간이 없어 폐기 처분했습니다. 아픔이 많은 기관지 복간에 감회가 새롭기는 하지만 걱정이 앞섭니다. 이제 더 이상 당세가 줄어들 일은 없을 것이기에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장서 복간을 준비하신 동지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기관지가 복간되면 당원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여 노동당의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가는 노동당의 미래를 기관지 복간으로부터 시작합시다.

Date 2021.05.07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특집: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특집: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 특집: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5.07 | 추천 2 | 조회 1396
■ 미래에서 온 편지 33호(2021.05.) □ 특집: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홍세화 선생 '체제 전환' 강연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오늘 강의는 인문학적 접근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고, 인간과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목표는 성장이었다.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소유와 성장'을 넘어 '관계와 성숙'이라는 개념으로 변혁해야 한다. 해방의 조건은 관계의 성숙    한국 사회는 총체적 위기에 몰려 있다. 이 위기는 임계점에 가까이 왔다. 두 가지 위기가 있다. 자연과 기후의 생태적 위기, 그리고 기술 혁명으로 인한 체제 자체의 위기다. 곧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좀비’와 같은 처지로 인간이 전락할 지도 모른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인류는 극소수의 슈퍼엘리트와 절대 다수의 하류 인간으로 구분될 것이다.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제조되는 인간상, 그 세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자들은 거기까지 10~20년을 말한다. ‘정권이 아니라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우리 당의 모토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한 소유의 문제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현실에 있다. 노예의 반란이 성공해도 주인만 바뀔 뿐이지 노예는 노예로 남는다. 지난날 촛불 혁명에 이은 오늘 정치 현실을 보라. 이런 현실을 기대한 것인가. ‘노예’를 ‘인민’으로 바꾸어도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까지 계속 혁명과 투쟁을 말해 왔던 사람들도 권력을 다시 소유하려고 한다. 반 혁명은 물론이고 혁명조차도 권력을 소유하려고 한다. 소유에 매몰되어 있을 때 지배, 착취, 정복이 정당화된다. 소유는 주체와 객체를 필연적으로 구분하고 객체를 타자화하는 폭력성을 띤다. 우리가 싸우는 과정은, 싸움을 통해 획득하려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해방의 조건을 이제 '소유와 성장'이 아닌 '관계의 성숙'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문제는 소유다    그동안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에 기대를 걸었다.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이 있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지배를 인간의 혁명으로 극복할 수 있을 지 비관해 왔던 것이다. 오늘의 위기는 총체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단독의 위기가 아니라 인류의 위기 그 자체다. 인류가 지금까지 자연과 맺어 왔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보겠다. 원시 공산 사회가 있고 나서 노예제, 그리고 봉건 사회, 그 다음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했다. 그 다음을 우리가 전망해 보자. 원시에 자연은 두려운 대상이었다. 인간 간의 관계는 그래서 자연스러운 연대로 나아 갔다. 40~50명 되는 밴드에서 첫 번째 두려움이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두 번째는 밴드 일원이 죽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숫자가 줄어들 때 내가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두려움. 그것이 그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무지하고 야만적인 시대라 하여도 그것을 원시 ‘공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었던 배경이다.   농업 혁명으로 잉여 생산물을 생기면서, 미래를 도모하는 소유에 집착하게 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게 되면서 동시에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 소유와 지배가 한 걸음 같이 나아가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말할 것도 없이 극한으로 갔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는 더욱 더 강력해 지고,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거의 농노제보다 더욱 심각해졌다.   이제는 인간이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인간과는 달리 자연에 스스로 귀의함으로써 자연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 사이의 관계 역시 재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에 갖는 희망의 근거는 그것이었다. 그런데 인공지능 혁명이 발생하며 그 관념이 깨졌다. 초인간이 등장하여 ‘운명을 지배’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절대 다수의 인간은 좀비로 갈지 모른다.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에 너무 쉽게 기댄 것은 아닌지 생각하였다. 생산 수단의 사회화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제 남은 해법은 무엇인가. 생산 수단의 사회화가 답이다. 앞서 얘기한 여러 문제는 결국 생산 수단의 사회화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부르주아 지배 세력이 인민에게 가짜 의식을 심어 주는 문화적 헤게모니 수단을 사용한다. 학교, 기성 정당, 교회, 미디어가 그렇다. 노동 자체도 추락하고 있다. 일자리, 질 모든 면에서 추락한다. 마르크스는 19세기에, 자본에 대항하는 무산계급 힘의 원천이 숙련 노동이라고 봤다. 자본이 숙련 노동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 기술에 의하여 숙련 노동 자체가 쓸모없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생산 수단으로 자본이 점유하고 있다.   투쟁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마저도 어렵다.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얻고 철학은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물리적 무기를 획득해야 한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부르주아 지배 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교육의 문제도 심각하다. 우리는 교육 받으며 생각을 주입 받았다. 정답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아서, 마치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의식 세계가 완성된 관계에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배고프지만 생각은 고프지 않다. 한국 사회는 선동은 가능한데 설득이 없는 사회다. 기존에 가진 생각을 증폭할 수는 있지만 생각을 변화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정치 운동과 체제 변혁 운동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관계성의 회복으로 극복하자    관계성으로 극복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을 착취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생산 수단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했다. 혁명, 반혁명, 그리고 소유라는 틀에 갇혀 사회적 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한정하는 담론이었다. 특히 우리 젊은 세대에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불안이 크다. 사회적 동물 인간을 경제 동물로 축소 시키는 것은 불안과 욕망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관계의 중요성, 풍요로움, 돈독함, 품격을 고민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설득을 쉽게 포기했는지 모른다. 나도 설득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내 가족, 이웃, 친구부터 설득해 나가야 한다. ‘나’의 관계 설정부터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소유에 대한 불안으로 관계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었다. 우리는 고집스럽고, 미디어라는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지배를 받고 있고, 정답을 주입하는 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포기했던 것을 벗어나 스스로 공부하고 설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조직하라, 학습하라, 선전하라. 다들 알고 있을 레닌의 3단계가 결국은 답이다. 노동 운동, 진보 정치 운동 모두 설득이 요원한 사회이기 때문에 학습과 선전이 어려운 환경이다. 한국의 진보 정치 운동론은 그 두 가지를 건너뛰고 조직에 나섰다. 운동의 목적이 권력 투쟁이 되어서, 조직을 동원하는 것이 곧 운동인 양 되었다는 것이 현 실태이고, 오늘날 진보 정치 운동과 노동 운동이 표류하고 지리멸렬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운동이 건강성을 상실한 것은 우리가 설득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모색은 게을리 하고 소유에 집착해 왔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 관계의 풍요로움, 관계의 성숙에 초점을 맞춰야 그 길이 열린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계급적 정체성과 조우하며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 ‘선배를 잘못 만나서’ 진보적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만하다. 몇 권 책을 읽은 것으로 모든 걸 다 파악한 양 한다.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는다. 이런 점을 반성하며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집요해야 한다.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나라는 존재는 내가 맺는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 ‘총화’이다. 그것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실천과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 생활 자체에서 스스로를 혁명하고 바꾸는 것이 체제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소유는 곧 지배, 착취의 폭력성을 띠고, 모든 관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눠 버린다. 우리는 설득을 통하여 자본주의 체제와 싸워 나가고, 그 과정 속에서 생산 수단을 사회화 해야 한다. 

Date 2021.05.07  | 

By 미래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