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꼬뮤니따 혁革이네 대표 구자혁

by 노동당 posted Mar 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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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카페로, 그리고 광장으로



요즘 ‘핫 플레이스’로 뜬 서촌의 옥인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상한 공간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핸드드립 커피와 음료를 즐길 수 있다는 걸 보면 최근 이 동네에 부쩍 늘었다는 카페 중 하나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화나 기타를 가르친다는 안내문도 붙은 걸 보면 카페만은 아닌 듯도 하다. 게다가 서촌의 파리바게트 효자점과 통영생선구이’가 강제집행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며 이 가게들을 지키자고 호소하는 게시물도 붙여놓은 걸 보면, 결코 예사로운 공간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대형유리 너머에 진열된 단 한 권의 붉은 책이 낯익다. 다름 아닌 『미래에서 온 편지』 27호. 매달 진열해 놓는다는 『미래에서 온 편지』 때문이라도 노동당원이라면 한번쯤은 선뜻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이다.
다섯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이곳에서 잡았다. 얼마 남지 않은 노동당의 지역거점공간 중 하나인 ‘서촌 꼬뮤니따 혁革이네’. 한낮에도 영하 10도를 밑도는 혹한기라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과거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이하 노문연)에서 활동했고,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현재 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이자 종로·중구 당원협의회 위원장으로 있는 구자혁 동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 입구에 『미래에서 온 편지』가 있으니 반갑다.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공간인데, 당 기관지를 대놓고 진열해두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은가? 혹시 인터뷰 때문에 일부러 진열해둔 건가?


구자혁(이하 구) : 아니다.(웃음) 기관지는 늘 진열해왔다. 매달 받는 대로 교체해서 진열해둔다. 2014년 구의원선거에 나간 후, 동네 사람들은 혁이네가 어떤 공간인지 내가 누구인지 다 안다. 노동당원임을 밝힌 후에 오히려 더 편해졌다. 혁이네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이 공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지만, 노동당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과거에 노동당을 멀게만 느꼈다면, 이제는 가깝게 느낀다. 이 동네 파리바게트 효자점이나 통인시장 집회에 내가 참여하는 것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기타레슨을 받는 학생 수도 거의 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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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네에 진열된 『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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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꼬뮤니따 혁革이네 전경


미 : 당의 지역거점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간을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는가? 


구 : 지역거점이 있어야 사람들을 편하게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다. 기타레슨을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공간을 2013년 10월부터 열었는데, 처음 3개월 동안은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맨날 우리끼리 커피 마시다 가고, 책 보다 가고 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기타레슨을 시작했다. 그랬더니 문의가 오기 시작하고, 학생 한 명 한 명 가르치면서 입소문이 났다. 내가 혼자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문 열고 들어와서 상담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타수업을 하고 있으면 엄마들이 지나가다 안을 들여다보게 되고, 문 열고 들어와서 내 아이도 몇 살인데 하면서 상담을 한다. 선생과 제자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주민들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친한 사람 한두 명 잡는 게 너무 중요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자기 아들 기타레슨을 알아보려고 들어왔다가, 회원가입을 하면 수업료를 30% 할인해준다는 글을 보고는 회원가입에 대해 묻더라. 혁이네 후원회원가입이라고 했더니, 그 분이 회원가입을 하고는 자주 오셔서 커피도 마시고 동네 얘기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 분과 마음이 맞아서 일식도시락 만들기 교실을 열었다. 세종호텔의 일식셰프 고진수 동지를 강사로 불러서 진행했는데, 주민들 반응이 무척 좋았다.


기타, 공장에 가다


미 : 과거 노문연에서의 활동이 지금 기타수업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안다. 노문연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구 : 학교 다닐 때 노래패였다. 88년부터인가 해마다 메이데이 행사를 연세대에서 해왔는데, 당시 연대 노천강당에 2~3천 명이 모이면 문화제를 진행했다. 그때 어떤 선배가 사진, 미술, 풍물, 노래, 춤 등 대여섯 개의 분과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집체극을 준비했다. 노래 같은 경우 사람이 부족하면 노래패 ‘새벽’의 선배들이 각 학교 후배들을 불렀는데, 그때 코러스 정도로 참여했다. 그때만 해도 노문연, 당시의 민문연에 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메이데이 당일 공연이 있어서 거제 대우조선에 내려가게 되었다. 당시 대우조선 노동자 노래패 이름이 ‘한가슴’이었나 그랬는데, 그분들 작업하는 현장엘 따라갔다가 노동조합에서 만든 유인물을 처음 보았다. 그 전에는 학생들이나 비합법 정파들이 대규모집회에서 뿌리는 유인물들만 보다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 얘기를 직접 쓴 유인물을 보고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유인물들은 다 말만 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유인물을 챙겨서 학교로 올라왔고, 문화예술운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문화예술운동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많았는데, 그때 거제에 가서 보고는 이 사람들과 같이 무엇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 후 군복무 중 서울에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만난 한 선배가 “너는 노래하고 작곡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을 만나서 설득하고 조직하는 일을 더 잘 할 것 같다”며 노문연의 노동문예국을 소개했다. 노문연은 문학, 연극, 음악, 춤, 탈춤, 풍물, 영화, 미술 등 여덟 개 분과와 선전국, 교육국, 노동문예국 등 세 개 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노동문예국은 노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노동자밀집지역에 가서 이 사람들이 현재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고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면밀하게 조사를 하고,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역할을 했다. 예술가들은 이를 통해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람들 만나서 술 먹고 얘기하는 거 좋아하니까, 해보자고 결정했다.
그때 선배들이 울산 현대중공업, 지하철, 거제, 창원 등에 내려가 있었는데, 경기 동북부에 원진레이온이라는 큰 공장이 있었다. 원진레이온이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기 때문에 그 공장을 중심으로 지역 노동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곳에 노래패가 없었다. 원래는 ‘새벽’에 요청을 했는데, 당시 ‘새벽’ 선배들이 경기 동북부를 지원할 여력이 없어서 내가 직접 갔다. 그래서 기타 가르쳐 드리고 노래도 같이 했다. 경기 동북부에서 활동을 하면서 네 개의 공장에 강습을 더 나가서 경기 동북부 노동자연합 노래패를 만들었다. 이 사람들이 든든한 받침목이 되어 경기 동북부 노동자협의회를 만들어 파업도 준비했다.
노문연 활동을 생각해보면, 그때 연극분과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노동자를 싣고 가는 아홉 대의 버스>라는 공연을 했다. 그 공연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 대본도 그렇고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집체극을 했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한 시간짜리 공연을 하는데 사람들의 집중도가 흩어지질 않았다. 당시 나는 이 공연의 수준이 방송에서 하는 버라이어티쇼보다 더 높다고 생각했다. 아쉬운 점은, 누가 해산을 시킨 것도 아닌데 페레스트로이카선언 이후 사람들이 썰물처럼 쫙 빠져나간 일이다. 갈피를 못 잡은 거다. 북유럽으로 유학 간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기자, 방송국 PD,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등이 되는 형들이 많았다. 


미 : 노문연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의 관계는 어떠했나? 노선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구 : 노문연과 민예총 모두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나왔는데,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PD 중심의 민중문화예술운동연합으로 바꾸면서 NL계열이 나가서 만든 게 지금의 민예총이다. 지역마다, 특히 대구의 경우는 많이 달랐지만, 서울 민예총의 경우는 NL 색채가 강했다. 이후 민문연은 PD노선을 더 뚜렷하게 하면서 노문연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는 민예총이 지역 민예총을 만들 때 노문연도 지역조직사업을 같이 했다. 지역에서는 문화예술운동에도 노선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까, 잘못하면 다 뺏기기 때문이다.
학교의 경우 지민주 씨가 나온 ‘예사가락’이라는 노래패가 있었다. 원래 ‘예사소리’와 ‘가락’이라는 두 개의 노래패였는데, 총학생회에서 합치라고 해 이 둘을 합치면서 이름을 ‘예사가락’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예사소리’는 NL계열이었고 ‘가락’은 PD계열이었다. 그러다 보니 굉장히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가락’은 노래를 가르칠 실력이 안되었기 때문에 정치학습만 지도하고 노래는 ‘예사소리’가 지도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학습은 PD에서 하고 노래는 맨날 NL의 통일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기타, 카페에 가다


미 : 노문연에서 제일 막내였던 모양이다. 선배들도 다 떠난 마당에 다시 문화예술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구 : 내가 제일 막내다. 그래서 예전에 노문연 모임을 하면, 내가 형들 담배를 사야 했다. “자혁아, 담배 좀 사 와라” 그러면 돈 쫙 걷어서 형들마다 담배 뭐 피우는지 물어서 담배 심부름을 했다. 그러면 대신 그날 술값 면제해 주고, 택시비 받았다.(웃음) 지금도 노문연 선배 연락처를 내가 제일 많이 갖고 있다. 그래서 경조사가 생기면 나한테 다 연락이 온다.   
이후에는 마케팅 관련 일을 했는데, 2004년엔가 장애인 집회에 갔다가 거기에 노래하러 온  지민주 씨를 만났다. 그런데 뒤풀이 자리에서 지민주 씨가 옛날에 서로 공연 기획한다고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사라졌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정말 중요한 일을 안 하고 살았구나, 기획을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왜 여태까지 등한시했을까 반성했다.


미 : 같은 문화예술운동이지만 노동자 중심 문화예술운동에서 지역주민 문화예술운동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안다.


구 : 서촌의 필운대로는 90년대에 만든 길이다. 그때 벚꽃나무를 심었는데, 이제 20년이 넘어서 봄이 되면 꽃이 가득 핀다. 그러면 여기 자치위원회가 행사를 하는데, 얼마나 답답하고 몰상식한지 모른다. 가수 불러서 놀고, 새마을부녀회 와서 족발 파는 것도 다 좋다. 가장 한심한 짓이 뭐냐면, 만국기를 거는 것이다. 아니, 꽃을 보러 사람들이 왔는데 왜 꽃을 가리나? 난 그게 제일 한심하다. 축제를 하려면 동네 특성을 잘 살려야 한다. 이 동네는 초등학생이랑 중학생이 많다. 그렇다면 이 동네 가치를 찾아서 글짓기대회나 그림대회 이런 걸 하면 좋지 않나. 또 한편으로는 이 동네 사람들이 직접 찍은 동네 사진이나 다른 동네 사람들이 와서 찍은 이 동네 사진들도 전시하고,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도 소개하면 얼마나 좋은가. 다른 방법도 찾아보면 좋은데, 동네만 시끄럽게 저런 축제를 왜 하는지 모르겠더라.
작년에는 동네 분들이 서울시 지원 사업을 신청할 때 도와드린 적이 있다.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이라고 해서 세 가지를 신청했다. 첫째는 이곳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직업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SK 텔레콤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뒷집에 살아서 광고대행사 견학을 다녀왔다. 둘째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큐레이터를 섭외해서 박물관의 학예사들이 전시를 어떻게 기획하고 준비하는지 보여주었다. 셋째는 ‘나도 우리 마을 기자’ 콘셉트로, 매일노동뉴스 기자 한 분을 불러서 기자란 어떤 사람인가 소개하고 그룹을 나눠서 취재를 했다. 지역의 축제를 기획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일도 해서, 우리 동네의 가치는 땅값과 집값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고 옆집 아이들도 보살펴줄 수 있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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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기획을 통해) 우리 동네의 가치는 땅값과 집값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고 옆집 아이들도 보살펴줄 수 있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좋겠다.”


미 : 문화예술을 통해 마을살리기 같은 것을 해서 재개발은 막았지만, 집값은 오르고 세입자는 쫓겨나간다. 지역문화예술운동도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서촌은 이 문제가 특히 심한 지역으로 안다.


구 : 기타강습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일산의 한 아파트에 사는 미술작가에 관한 기사를 보고 나서였다. 주로 고래를 그리는 작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래를 그리다 보니 그림 크기가 커서 집에 쌓아두는 데 한계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위층, 아래층 주민들에게 부탁해서 복도에 그림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는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봤더니, 동네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고 와서는 이건 엄마 고래고 이건 새끼 고래고 하면서 대화를 나누더란다. 그렇게 그림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반상회를 열어서 동 전체 계단에 그 작가의 그림을 걸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런데 역시 자본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 동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정든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자 그 미술작가는 그림을 뗄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처럼 우리가 예술행위를 시작하면, 특히 지역과 관련해서 시작하면,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자본의 새로운 행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서촌에는 대형마트 하나 없고 멀티플렉스 하나 없다. 하지만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런 게 있어야만 우리 동네가 발전된 동네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사는 거 좋아한다. 범죄율도 낮다. 여기 파출소 있는 양반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 하는 파출소가 옥인동과 사직동 파출소라고 한다. 게다가 종로도서관 있지, 어린이도서관 있지, 얼마나 좋은가. 여기 어린이도서관은 책도 많다. 그런 도서관이 여기 마을에 있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거다. 3년 전 쯤엔 서울문화재단 측이 서촌에 와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거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고, 결국 우리가 쫓겨난다면서.  
그나마 서촌의 경우에는 새로 이사 들어오는 사람들도 이 동네의 가치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서촌」이라는 페이스북그룹이 있는데, 천 몇 백 명이 가입해있다. 이 동네 2,30대는 거의 가입했다고 보면 된다. 이 사람들은 그런 방식의 커뮤니티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통영생선구이나 파리바게트 얘기를 하면 상당히 공감을 한다. 파리바게트 2심 들어갔을 때 연서명을 받았는데,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기타, 광장에 가다


미 : 마지막으로, 준비 중인 기획이 있다면 들려 달라.


구 : 옆집에 예술가가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기대한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많이 나누고 싶다. 동네 곳곳에 살고 있는 예술가들도 많다. 올봄에는 이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기타를 가르치는 사람이 나 말고 두세 명 더 있다. 연락해서 같이 기타 연주회를 하자는 제안도 해보려 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메이데이 행사가 있다. 전야제 행사로,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처럼 노동자의 서재를 여는 거다. 텐트에 자기 서재를 공개하는 행사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꺼내놓고, 자연스럽게 토론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거다. 노동자들이 결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고, 사고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전야제 때 밤새 영화를 상영할 수도 있다. 광장에서 영화를 계속 틀면 볼 사람은 보고 잘 사람은 자고, 돈이 필요한 장기투쟁사업장은 바자회도 열고. 미술이건 사진이건 노동을 소재로 작업했던 작품들을 받아서 전시도 하고 싶다. 이런 일을 계기로 서로 간에 소통을 할 수 있고, 각자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본다.
올해 메이데이 행사에 와서 교감을 얻었다면, 이 사람에게 메이데이 행사장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고 싶은 곳 또는 부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일반 국민들에게 메이데이가 단순히 폭력적인 이미지였다면,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세계는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글 · 사진
현린 |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미래에서온편지 28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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