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해보는 총선평가 - 그릇 만들기, 민주주의, 反국가주의

by 문성호 posted Apr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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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가 당게에 글을 자주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글은 아마 지금까지 썼던 모든 글 중에서 가장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중구난방인 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도 하나도 명확히 정리하기 힘든 많은 이야기들을 일단은 자투리 글들의 나열 식으로 풀어봅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뒷담화 깔 여지가 참 많은 글이 되겠지만, 이해하고 함께 고민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1.

대표단 사퇴는 일단은 반대의 의견입니다.

혼자서 이번 총선을 차근차근 복기를 해 보았습니다. , 다들 이번 총선 결과를 가지고 많이 분석을 했으니 우리에 한정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이렇게 해보면 어땠을까?”라는 여러 가지 가정을 해 보았으나, 그 어떤 출발점도 지금의 결과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노동당의 현재 상황, 포지셔닝을 극복할 여지라는 것이 과연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의 결과를 현 대표단에게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좀더 실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현 대표단이 물러나고 나면 다음 집행부를 꾸려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누가 지금 상태의 노동당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비전과 활동력을 보여줄 수 있나요? ,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다른 의견그룹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번 총선에서 다른 의견그룹 역시 대안으로 인정받기에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선뜻 내키지가 않습니다. (, 욕먹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현재의 노동당이 나아가야 할 바를 설득력있게 밝히고, 그를 추진할 수 있는 물리적 추진력까지 마련해서 당권에 도전한다면 지금의 대표단에 책임을 묻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기 위한 선거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일단 사퇴부터 시키고 보자는 논의는 현 대표단에게도, 그리고 당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기 힘들 것이라 봅니다. 일단은, 사퇴 요구는 좀더 보류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원래 박쥐입니다. 총투표 부결되고 나서는 나경채 전대표의 사퇴에 반대했습니다.)

 

2.

저는 이번 선거의 결과를 진보정당 운동의 외적 요소로부터 한 순환의 마무리가 강제되는 시점이 지났는데, 그에 역동적으로 스스로 변화시켜오지 못한 결과라고 평가합니다. 민주노동당과 청년진보당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진보정당 운동의 체제 말입니다. 두 정당의 전성기 시절은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정당 모두 대중조직의 지지하에 그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지지를 업고 있었고, 그 지지를 가지지 못한 청년진보당-사회당은 민주노동당에 비해서는 훨씬 힘든 상황이었지만, 좌파 학생운동 내 다수파였던 전학협의 지지를 업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학협과 민주노총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지만, 여름마다 100명 가까운 대학생이 전국을 휩쓸고 다닌 헌신성만큼은 분명 청년진보당-사회당의 큰 힘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두 당 모두 새로운 운동주체의 재생산 구조는 민주노총-전학협이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진보신당과 청년진보당-사회당은 자신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던 대중적 기반을 잃은 상태로 노동당으로 합해졌습니다. (, 여기서 또 욕하는 소리가 한바탕 들리기 시작하네요. , 어찌됐든 좋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운동 조직의 부재는 정의당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맞습니다. 진보신당 내의 통합파-재편파로 이어지는 무리들은 대중적 재생산 구조의 상실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갑니다. 참여계와 주체사상파의 일부와의 연합, 그리고 스타 정치인의 전면화가 그들의 문제해결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결과가 정의당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이 자신을 호명하는 수사로 진보정당이 아니라 선명야당을 선택한 것은 이 해결방식의 우회적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는 상황이 분명 나은 편이지만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기에 위기를 조금 지연했을 뿐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못한 이유는 지금 하던 것을 꾸준히 계속하면, 언젠가는 대중이 알아줄거야라면서 활로를 개척하는데 게으름을 부렸던 결과일 것입니다.

 

3.

결국, 운동의 흥망성쇠는 주체의 재생산을 어떤 규모로 이어갈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강력한 대중조직 내에서 재생산의 근거지를 마련해 왔던 진보정당 운동의 그 한 순환을 마무리하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노총, 학생운동이 다시 노동당 운동의 대중적 근간이 되어줄 것이라는 비전은 무책임합니다. 그냥 감 떨어지기를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봅시다. 민주노조, 학생회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요? 그것은 과연 완결적인 자기논리를 가진 조직이기는 했나요? 우리는 종종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비웃습니다. 지역 발전의 논리를 가져다가 당선되고 나서 국회에서는 각자 속한 정당의 이해만 대변하는 것 말입니다. 아쉽게도 제 경험에 학생회도 똑같았습니다. 학과, 대학의 이해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당선된 이후에는 자신이 속한 학생운동 그룹의 주장을 마치 자신이 속한 학과/대학의 입장인양 학생회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비완결적인 구조가 가능했던 것은 학생회 그 자체가 강력한 대중운동의 산물이었으며, 학생운동이 학생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대중운동이 강력한 대중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역은 가능할까요? 강력한 대중조직을 만들면 강력한 대중운동이 일어날까요? 아니, 대중운동 없이 강력한 대중조직의 형성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요?

여전히, 노동당이 흥하는 방법은 주체의 재생산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주체의 재생산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지금 진보정당 운동의 위기의 본질, 혹은 한 순환의 마감이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4.

이번 총선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저는 어렸을 때 보았던 주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되면서 원작의 문제의식이 거의 잊혀지긴 했지만, 책으로 본 주라기 공원은 인간이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총선을 지나고 각종 여론조사가 하나도 안 맞는 이유는, 여론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재생산되면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우리보다 훨씬 유능한 지배계급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경로를 걸어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번 선거는 이렇게 이렇게 될거야라고 생각하는 많은 프로 정치가들조차 진정으로 여론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번 총선의 가장 큰 의의라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 거야라는 우리의 방향에 관한 설정도 큰 틀을 합의하고 나면, 그 이상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성의 영역에 남겨져 있습니다. 각종 통계자료를 동원한 예측보다 오히려 옛 선현의 한 마디가 더 과학적입니다.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사람이 할 바를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다)

 

5.

대중조직을 근간으로 하는 진보정당 운동의 한 순환의 마감. 새로운 근간의 출현 가능성은 미지의 영역 속.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또다른 대중운동 속에서 스스로 대중조직이 될 준비를 하는 것”. (되는 것이 아닙니다. 되는 것은 여전히 하늘의 뜻에...)

최초에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하자고 한 문제의식에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누구한테 노조하자고 하는 것보다는 진보정당 하자고 하는게 더 쉽지 않겠냐?”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대중조직을 통해 재생산되고 그를 통해 지지를 이어왔던 진보정당이 원래의 문제의식, 가장 만만한 운동 공간이 되는 것. 여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이 盡人事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셋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릇 만들기, 민주주의, 국가주의.

 

6. 그릇 만들기

중식이 밴드 논란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저는 인생에 참 고마운 한 선배가 있습니다. “남중-남고나온 경상도촌놈이 기계과에 입학해서 술만 먹으면 음란가요 불러대는데, 불러다가 차근차근 그러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준 여성학회 선배였습니다. 중식이 밴드가 불편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여혐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점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음란가요 불러대는 제 예전의 모습을 보는 듯 해서입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정의당이 잘못한 이유는, 함께 하자고 찾아온 그들에게 그들의 노랫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왜 폭력적으로 들릴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들 이야기로 넘어가 봅시다. 요새야 자주 못 만나고 페이스북 정도에서 어떤 생각하는지 정도 가끔 듣는 친구들은 이번 선거에 대해서 노동당과 녹색당을 놓고 갈등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진보정당 운동의 경험이 있고, 특정한 계기로 인해 당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의 감수성을 가진 친구들은 대체로 정의당을 지지하기는 참 힘듭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꼭지에서 조금 더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을 놓고 갈등하던 친구들 대부분의 선택은 녹색당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짜 이름 때문이었을까요?

다른 이야기로 또 넘어갑니다. 사회당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던 전학협은 2003년에 돌연 지지를 거두고 스스로를 해소합니다. 학생회연합체 운동의 한계, 노선에 따른 분화 등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사회당과 단절한 결정적 계기는 딱 잘라 하나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당 당대회 때 성폭력 가해자였던 이일재 선생님의 축사. 그에 대한 해명과 재발 방지 약속의 거부. 성폭력 2차 가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인 선배들에게 실망한 후배들은 사회당 운동과 단절했습니다.

이제 그릇 만들기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자생적 운동들이 여성주의/평화주의/생태주의의 감수성을 가지고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노동자운동에 대해서 우호적이지만, 경계심(?)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대중운동인 노동운동하에서 부차화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위원회를 만들었더니 성폭력 사건 뒤처리만 하게 되었다던가, 여성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노동정책 한 귀퉁이에 여성노동 정책 끼워넣은 것이라던가, 머리띠 질끈 동여맨 아저씨 뒤에 애 업고 있는 여성 사진을 끼워넣은 민주노총 포스터라던가, “사나이 한평생 살아간다 우리는 진짜 노동자”, “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 버리고등등...

우리가 만들 그릇은 (애초에 우리가 그 의심을 형성했건 아니건) 그 경계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합니다.

정책, 노선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수성의 문제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해야지라는 감수성은 박근혜 뒤에 쉽게 을 붙이게 합니다. “병신년을 언어 유희같이 사용하면서 쾌감을 느낍니다. “에이, 예쁜 건 예쁜 거지. 그것도 말 못하게 하나”. 말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맥락이 누군가에게 폭력적이라면 그것도 폭력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기 검열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면 반드시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받아들여질 맥락을 청자의 입장에서 고민해 보고 이야기하는 습관. 술자리에서 은근히 흘러 나오는 성차별적 발언들에 대해 버럭말고 그건 잘못된 이야기라고 차분히 이야기하는 아저씨 당원이 많아질 때, 우리 당은 점점 더 좋은 그릇이 되어갈 것입니다.

여성주의, 평화주의, 생태주의와 연대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여성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인 사회주의자 되기.

 

7. 민주주의

우리는 국회의원 선거의 방식으로 소선거구제의 폐지와 완전비례대표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연동형 비례대표제등의 이름을 많이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서 그래야 소수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라는 답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두 선거구제의 배경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견해가 숨어 있습니다. 소선거구제, 그리하여 승자독식구조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다수결이기에 일단 다수결로 당선된 대표에게 몰아주는데 망설임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이 관념과 싸워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본래적인 의미는 모든 사람의 의견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선거구제-승자독식 구조는 승자를 제외한 나머지에 투표한 의견의 가치를 0으로, 그리고 승자에게 투표한 의견의 가치를 100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다수결이라는 하나의 수단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니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위배하는 일입니다.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이 관점 하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의견 하에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 못한 소수의 의견이 최대한 동등한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그들의 의견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는 것.

노동자운동, 학생운동 등 기존 대중운동은 기본적으로 다수자 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노동자가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의견이 중요하다”, “학생 대중 다수가 이 조직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 조직의 의견대로 학생회를 운영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도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관념과 싸우지 않고 그에 따라 운동을 지속해 온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수자 운동의 감수성이라고 좀 거칠게 요약해 둡시다.

다시, 어떤 그릇이어야 하는지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2000년대에 대중조직에 천착하지 않고 스스로를 조직해 온 운동들이 가지고 있는 소수자 운동의 감수성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어 가는 것.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관념과 싸우며 모든 사람의 의견이 동등한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는 것. 그에 맞는 정책, 그에 맞는 운영원리. 표결보다는 문제의식을 하나씩 맞추어 나감으로써 합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의사결정 과정.

 

8. 국가주의

이렇게 길게 쓸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글이 아닌데 쓸데없이 길어집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혹은 그의 전사였던 수많은 이름의 당들이 반동적인 정책을 펼 때면 쓰는 딱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국익”. 국익을 위한 이라크 파병, 국익을 위한 한미FTA, 국익을 위한 4대강 사업, 국익을 위한 재벌총수 사면... 이 단어가 한국 정치가 도저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국가주의”.

국가주의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시키는 사상원리나 정책이라고 나옵니다. 조금만 더 우리 나라 정치 지형에 맞게 번역해 봅시다. 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를 국가의 이해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포장하고, 그에 따라 피지배계급을 무리하게 국가와 동일시하여 그 이해관계에 복속시키는 것. , 이래도 어렵네요. 가진 자들의 이해관계를 국가라는 매개를 이용해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해관계인양 착시 현상을 일으켜 강제하는 것. 말 만들기 진짜 어렵습니다.

한국 노동의 불안정성,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 등은 모두 하나의 단어에 의해 합리화됩니다. 국가경쟁력. 도대체 국가가 경쟁력을 가지면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 하나도 설명하지 않은채 말입니다. 21세기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마주친 가장 큰 적대는 이 국가주의입니다.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설명해야 할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1) 국가라는 것을 매개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공유하고 있는 이해관계라는 것은 없다.

2) 지배 계급이 국익이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피지배 계급의 수탈을 통한 지배 계급의 이익일 뿐이다.

이런 방향을 국가주의라고 부릅시다. 국가를 매개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가 일치된 듯한 환상과 싸우는 것. 민중의 이해를 국가와, 따라서 지배 계급과 분리해 내는 것. 국가주의의 전면화를 노동당의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제안해 봅니다.

 

그래서, 다음 선거에 이런 뚱딴지같은 인터뷰를 기대해 봅니다.

인터뷰어 : 저출산 문제에 대한 노동당의 대안은 무엇인가요?

노동당 : 완전고용입니다.

인터뷰어 : ? 무슨 뚱딴지같은 답변인가요?

노동당 : 생산 가능한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라면, 한국 사회는 이미 완전고용 상태로 들어섰어야 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인구조차 완전한 취업 상태로 넣을 수 없는 상태에서 생산 가능한 인구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늘어난 인구는 늘어난 실업을 의미할 뿐입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실업 인구가 많아야 노동력을 더 쉽게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의 입장에서만 위험합니다. 노동당은 노동자들에게 강제되는 실업의 위협을 없애 나감으로써 부부가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아이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없애 나가겠습니다.

 

21세기 한국 자본주의 운영의 실체와 싸워 나가는 조금 더 구체화된 방향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9. 분별정립

진보정당의 난립 상태에 대한 자기 해명. 국가주의의 방향을 가질수록 두 세력과의 분별정립은 명확해집니다.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정의당은 국익을 위해 한미FTA와 이라크 파병을 강제한 대통령의 추종자들, 그리고 국가주의 대마왕(물론, 그 국가는 한국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강성대국론) 주체사상파의 연합이고 민중연합당은 그냥 국가주의 대마왕 주체사상파 정당입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정의당과 민중연합당은 국익에 관심이 있는 정당이고, 노동당은 국익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정당입니다. 21세기 한국 좌파는 국가를 매개로 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동일시된 이해 관계를 분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소수자 운동의 감수성과 함께 하는 그릇, 민주주의, 국가주의, 그 어느 것도 녹색당과의 분별정립을 돕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녹색당과의 분별정립이나 경쟁에 관심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에서 무조건 같이 할 수 있는 판을 구상하고, 장기적으로는 가급적이면 하나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1세기 좌파의 외연은 거기에서 결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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