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35호 202107
작성자
미래에서 온 편지
작성일
2021-07-31 17:57
조회
9697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강연 : 이영주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정리 : 이용규 편집위원



강연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백기완 선생이다. 2008년 (내가) 서울구치소 출소 후 인사 드리러 갔을 때, "이제 노동이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야 한다. 노동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다.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인정한 적이 없다. 노동은 시민권도 획득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말처럼, 노동이 주체로서 사회변혁을 만들어내야 할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 노동자가 시민의 자격, 한걸음 더 나가 사회변혁의 중심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미 노동자는 2천만을 넘어섰다. 노동자가 움직이면 체제가 전환될 것이다. 그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다들 전문가인 양 하는 게 학교와 교육인데, 모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말한다. 노동과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나는 노동을 해봤고 노조하는 사람들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많은 이들이 아는 노동과 노동조합은 대단히 부분적인 영역이다. 우리가 모른다는 전제로 함께 이야기해봐야 한다.


운동의 위기는 좌파의 위기

작년 민주노총 선거에 후보로 나왔었다. 선거 과정에서 가슴 아픈 기억부터 떠오르는데, 좌파들에게 단결된 모습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이나 산업을 불문하고 전국의 모든 좌파들은 고립 분산되어 있었다. 한데 반대로, 조직은 무너져 있는데 활동가들 하나하나의 저력은 대단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국 곳곳의 외로운 활동가 동지들의 영향력과 저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선되지 못했지만 선거운동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2014년 한상균 위원장 선거운동 당시 가장 부담스러웠던 건, 투쟁사업장과 비정규직 동지를 만나는 거였다. 우리가 약속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나 승리를 장담 못했고 무슨 약속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이번 선거에도 많은 투쟁사업장을 다녔는데, 그 동지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적인 총전선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많이 했다. 가장 절박한 사람들은 전국적 전선의 부재를 가장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절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시대를 보내는가 하는 반성이 되었다.

운동의 위기 깊은 곳에는 좌파의 위기가 있다. 집행부, 정권, 한국 사회 곳곳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먼저 반성해야 한다. 우파들에게 구호와 성명서로만 투쟁하냐고 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다. 개인이 하는 일과 조직적 사업의 차별성이 없다. 조직적 사업이 없다. 발생한 투쟁에 열성 연대한다. 그러나 그건 발생한 투쟁에 따라가는 것이지, 좌파 조직 어디도 투쟁을 만들어 내진 못한다. 정세분석을 하지만 누구도 정세를 만들어 이끌지 못한다. 이벤트는 있으나 계급적 전선이 안 만들어진다. 이게 현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좌파 활동에서 개인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려워진 시기다. 조직적으로 살피기보다 개인 측면, 인간 성장과 교육의 측면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넘어짐을 극복해야 어린아이가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좌파활동가들의 분위기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와 그를 통한 성장을 응원하는 문화가 없다. 좌파들은 그래서 행동을 두려워한다. 내가 과오를 일으키거나 실패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데, 그 경험은 본인이 직접 해야 의미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인 판단과 강요는 다른 사람들에게 학습의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인간은 신뢰하는 사람에게 설득된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설득, 선전, 학습은 그 이전에 신뢰가 형성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진보적 정치조직과 노동조합이 신뢰를 받았다.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 권위가 이제는 무너졌다. 이제 조직은 신뢰도 가는 기획, 정책, 조직력을 동원해야 한다. 조직이 개인 활동가에게 해 줘야 할 지원은 그런 것이다. 그래야 개인 활동가들이 설득, 학습, 조직화를 해낼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핵심역량은 뭘까. '개미컴배트'를 기억하는가. 곤충의 생태적 습성을 활용해 곤충을 박멸하는 과학적 기계라는 광고를 했는데, 실상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뚜껑을 열면 바람개비처럼 날개가 있고, 한가운데 독이 든 먹이가 있다. 곤충은 주로 직진하지 후진하는 곤충이 없다는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냄새를 맡고 들어갔으면 먹이를 입에 물고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열정적인 개미는 자기 조직을 더 빨리 죽인다. 성실한 바퀴벌레는 자기 가족을 빨리 몰살시킬 것이다. 동지애가 뜨거워서 독이 든 먹이를 빨리 갖다 준 벌레는 자기 조직을 빨리 파괴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 놓여있다. 우리는 매우 열정적이고 성실하고 뜨겁고 헌신적이다. 모두가 마음과 몸이 망가질 정도로 헌신했다. 그래서 좌파 운동이 잘 됐나? 내 열정 때문에 우리 조직이 죽는 것은 아닐까?


노동운동의 역사는 사회변혁의 역사

전사회적인 대중의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건 촛불집회였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정권이라는데 왜 그 뒤로 아무것도 안하는가, 라는 물음은 잘못이다. 전사회적 촛불이 있었으니 노동자들이 주체적인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해방 후 전평이 한국 최초의 전국 노동조합이다. 강령을 보면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부녀자 산전산후 휴가... 마음이 답답해진다. 100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뭐하고 있나. 1946년 미군정 공보부가 한 설문조사를 보면, 노동자 뿐 아니라 전 계층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왜? 사회주의가 뭔지 몰라서? 사실 이 시기는 삶 속에서 사회주의를 배우고 지향했던 시기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이론으로만 배운다. 지금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나오지 않는 것은 학교 교육에서부터 접근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것을 좀 더 보편적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접촉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87년 이후 노동자대투쟁으로 민주노조 건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노조가 2천개에서 4천개로 늘었다. 90년에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만들어졌고 90년 5월에 전국업종노동조합(업종회의)가 만들어진다. 이 두 조직이 함께 ILO 공대위를 만든다. 이 또한 답답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요구한 것이 바로 ILO 기본조약을 기준으로 한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였다. 우리는 아직도 이 투쟁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1995년 11월 11일 만들어졌다. 사회개혁투쟁, 노동법 개정 투쟁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업장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지역과 사업장을 뛰어넘는 전국 조직을 만들며 산별노조를 만들자는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민주노총 강령을 보면, 그전까지 있던 계급적 노동 해방의 요구가 '민주사회건설'로 연성화되었다.

그런데 2017년에 미국 노조 관계자들이 민주노총을 방문해서 질문한 것이 있다. 한국 민주노총은 왜 이런 식의 일을 하냐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근로개선과 임금협상을 하는 조직인데, 왜 민주노총은 그게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일을 하냐는 것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노동조합 역사와 같다고 설명을 했더니, 관계자가 미국은 이제 노동조합이 그 정도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미국은 이미 정당 내에서 노사협의가 끝나기에 사업장 수준의 요구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조합 밖의 노동자들

산별교섭을 통해서 지역과 사업장을 뛰어넘는 교섭 체계 갖자는 것이 고민이었지만, 산업별로 노동자를 가둬두는 한계도 있었다. 계급적 산별운동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라는 고민이 대두됐다. 전평-전노협-민주노총으로, 그리고 민주노총 합법화와 직선제까지 왔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전진하지 못하나. 우리는 항상 제자리인가. 우리의 구호는 30년간 똑같나.

우리는 노동조합운동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우리는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 운동은 노동조합 안에, 산업 안에 갇혀 있는가.

2020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전국 노동조합 가입 인원이 250만이다. 전체 노동자의 12.5% 뿐이다. 일단, 상급단체로 보면 민주노총이 제일이다(41.3%, 한국노총 40.2% ). 사업체규모별로 보면 300명 이상 사업장에 54%가 조직되어 있다. 100~299명 사이는 8,9%, 30명 미만은 0.1%다. 민주노총이 욕을 먹는 이유가 이것이다. 정규직 대공장 귀족노조, 민주노총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거기에 해당된다. 노동자들의 사업체별 전체 노동자수를 보면, 30명 미만 사업장이 무려 940만 명이다. 300명 이상은 260만밖에 안 된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곳에서는 최대한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어려운 사업장에서는 민주노총을 욕할 게 아니라 한국의 노동기본권에 대해 저항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사회적으로 하는 이야기다. 노동조합 밖의 노동자들은 어쩔 것인지 대책이 있나? 기껏해야 민주노총은 100만이고, 노조 미가입 1750만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은 그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나? 이것이 고민의 핵이다. 노조 밖의 노동자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580만, 비정규직이 72%. 임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 특수고용노동자 등. 이들을 포함해 계급 없는, 계급조차 빼앗긴 노동자가 한국에는 1000만이 넘는다.

노동자는 누구인가? 2006년에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천명하기를, 노동자는 고용관계 존재 여부에 기초하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은 다 노동자다. 농업노동자, 자영업자 등도 모두 단결권을 누려야 한다고 한 것. 이것이 결사의 자유다.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의 계급적 대표성과 권리를 누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것이 노동조합을 뛰어넘은 우리의 과제.


한상균 집행부

한상균 집행부를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좌파가 민주노총 집행부가 돼서 임기를 마친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한상균 집행부의 3년 사업 기조가 있었다. 첫 1년은 집행부가 한국사회 안에서 민주노총의 위치를 확보하자고 했던 시기였다. 선제총파업과 노동자서민살리기총파업을 민준총궐기로 승화시켰다. 2년차는 내부 혁신이 목표였다. 조직 내부를 확대강화하고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 이걸 기반으로 3년차는 전략투쟁에 나서려 했다. 전사회적인 투쟁을 배치한다는 것이 투쟁 3년차 계획이었다. 우리가 임기를 버티면서 유지했던 건 3년자 전략투쟁을 완성하겠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민중총궐기 직전 언론사에서 물었다. 10만이 모여 민중총궐기를 한다고 박근혜정권이 바뀔 것 같느냐?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민중총궐기로 박근혜정권은 변하지 않을 것이나, 이 경험을 통해 우리와 우리 사회가 변화할 것이다. 68혁명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현실 진단은 정확했던 것 같다. 2016년 10월 29일 민중총궐기 1년 행사가 촛불집회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게 1주년 집회였다는 것은 우리밖에 없지만.

한상균 집행부에서 제일 중요했던 건 2017년 630 사회적총파업이었다. 민주노총이 최초로 했던 비정규직 주체파업이다. 그전에는 대공장 위주의 투쟁이었다면, 최초로 비정규직 의제를 가지고 비정규직 주체가 투쟁하는 민주노총 총파업이었다. 물론 내부적 갈등이 심했고 원하는 만큼의 조직화도 안 됐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이라는 첫 발걸음이 되는 소중한 성과였다. 이게 바로 전략투쟁이다.


다음 전략투쟁, 그리고 사회변혁

문재인 정권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줬다. 한국사회 적폐 청산은 정권교체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두 확인했다. 정권교체를 넘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코로나가 주는 교훈도 마찬가지다. 한국사회의 안전과 평등은 현 체제로는 불가능하다. 체제를 바꾸자. 그러지 않고는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이 두 가지 지점에서 얘기해야 한다.

자본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강화해 나가고, 노동은 노동계급의 역사를 강화할 것이다. 노동자가 사회변혁의 주체로 서야 한다. 조직 정비와 현장 활동 복원, 민주노조 조직확대와 강화, 미조직 1750만 노동자와의 연대,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에 갇히지 않는 계급적 노동운동을 전략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

많은 선배들이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투쟁과 조직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선배들이 경험했던 투쟁이고 그들이 겪었던 조직이다. 2세대는 그들의 조직과 투쟁이 있어야 하고 그게 그들을 성장시킨다. 현장에 가보면 87년 투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동지들은 민중총궐기와 촛불을 이야기한다. 그들을 성장시킨 경험이기 때문이다.

조직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수많은 현장조직과 정치조직이 그렇다. 민주노총이 목적이 아니라 노동해방이 목적이니까. 우리의 투쟁은 바로 오늘 이 조직이 아니라 사회변혁이다. 조직보위론으로 빠지는 것은 우리의 투쟁을 우리 스스로 가두는 것일 터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길을 만들어야 한다. 절박하지 않으면 핑계를, 절박하면 길을 만든다. 우리가 가는 곳이 길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콩나물 시루에 물 붓는 것 같은 일이다. 지난하게 일하고 투쟁하는데 우리는 제자리인 것만 같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들이 수많은 구멍들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콩나물은 어느 순간 자란다. 우리의 운동이 이런 것이다. 하루하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나아가자. 우리가 함께해야 할 전략투쟁을 고민해야 할 때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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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3 | 조회 12019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편지를 띄우며 바이러스의 재확산에 폭염까지 겹쳐 모두들 힘겨운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과 확산 속도는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고민할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이상기온으로 급속히 녹아내리는 빙하와 폭탄처럼 쏟아지는 폭우는 지구의 내일이 더욱 암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를 띄웁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와 삶의 양식이고,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현재의 체제와 양식을 바꾼다면, 미래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작은 실천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복간 후 세 번째 발행하는 이번 편지는,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내용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우선 기획 기사를 추가하여, 미래의 사회주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난 7월 23일 창당 100주년을 맞이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평가를 실었습니다. 도서 리뷰에 이어 영화 리뷰 공간도 마련하였고, 첫 번째 영화로 <피어스트리트 3부작>을 소개합니다. 특집에서는 3월부터 이어오고 있는 노동당 기획강연 세 번째 순서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를 전합니다. 사람 편에서는 춘천에서 버스공영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김덕성 동지를 만납니다. 마감일을 넘기기 일쑤인 역사 편 ‘경성의 재발견’에서는 경성트로이카의 이재유와 삼동회의 전태일 사이 30년의 공백을 잇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33호에 비해 34호 조회수가 적게는 3배, 많게는 4배 정도로 부쩍 늘었습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독자 여러 분들의 커다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드시거나 유익한 소식에 ‘좋아요’도 눌러 주시고, 격려나 응원의 댓글도 달아 주신다면, 미래에서 온 편지가 더욱 풍성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함께 편지를 읽어 보실까요?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위원회 김석정, 나도원, 안보영, 이용규, 적 야, 현 린 + 제목을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 편지를 띄우며 □ 기획 : 중국 공산당 100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1편 : 중국에서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국 사회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 - 2편 :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공한 이유 □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1 □ 정세 : 7월의 정세 □ 사람 : '공공교통을 다시 디자인하다' 김덕성 □ 도서 : 조직구성원 모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 영화 : 저주받은 마을 쉐이디사이드의 숨겨진 이야기 □ 사진 : 서울의 경계를 걷다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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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기획 : 중국 공산당 100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1편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1 | 조회 10061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기획 : 중국 공산당 100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1편 중국에서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국 사회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 문영찬(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장) (필자 주: 이 글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기관지인 ≪정세와 노동≫에 약 1년 반 동안 연재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격’ 연재 중에서 13회 차 연재분을 요약한 것이다.) 1. 등소평 수정주의의 등장과 전개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이 후계자로 등장했으나 등소평은 당 중앙에 서신을 보내 화국봉이 제창한 ‘두 개의 무릇’을 비판하였다. ‘두개의 무릇’은 무릇 모주석의 방침을 따르고 무릇 모주석의 뜻을 따른다는 것으로서 문화대혁명을 긍정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이 등소평 등 수정주의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등소평은 두 개의 무릇은 교조주의이며, 진리의 기준은 실천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진리표준 논쟁이라 불리는 이 논쟁에서 화국봉은 등소평에게 패배했는데, 이는 교조주의는 수정주의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파(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파), 혹은 수정주의 세력은 권력 전체를 장악하였고, 1978년 중국 공산당 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현대화 노선 등 개혁, 개방의 정책이 결정되어, 중국 사회는 대전환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중국 사회는 이른바 ‘개혁’이라는 기치 하에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점차 약화, 해체하고 자본주의로의 전환의 길을 걸었는데, 이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뉜다. 첫째, 1978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의 시기는 쏘련의 코시긴 개혁을 모방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국유기업을 이윤 추구 중심의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개조하고 각 국유기업에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보면 여전히 계획이 주된 것이고 시장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둘째, 제2단계는 1980년대 초에서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기까지의 시기인데, 이 시기는 중국이 사회주의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경제로, 자본주의로 건너뛸 것인가를 놓고 진통을 겪던 시기였다. 이 시기 초반에 중국 공산당은 인민공사라는 집단농업체제를 해체하고 농업을 소농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공업의 국유기업에서 국가소유는 유지하지만 국가가 경영에서는 손을 떼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실시하였고, 국유기업의 신입 노동자들에게는 노동계약제를 실시하여 노동시장의 형성을 밀고 나갔다. 이는 국유기업의 신입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기업의 주인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같은 고용관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개체호(個體戶)라 불린 1인의 자영업자가 출현하였는데, 이들이 성장하여 8인 이상의 피고용자를 두면, 사영(私營)이라 불리는 사적 자본가로 간주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시기를 이론적으로 사회주의 상품경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시장화를 향한 이러한 흐름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는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부문 간 불균형 등이 심화되어 긴축정책이 실시된 결과, 인민들의 저항이 발생했고 그것은 1989년의 6.4 천안문 사태로 발전했다. 천안문 시위에 대한 진압은 중국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전위에서 인민에 대한 진압자로 전환했음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셋째, 제3단계는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 이후 1990년대 후반 국유기업의 주식제 기업으로의 전환까지이다. 천안문 시위 진압 이후 중국 경제는 침체에 빠졌는데, 이에 대해 등소평은 1992년 대외 개방 지역을 시찰하면서 이른바 남순강화를 발표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제창하였다. 등소평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계획과 시장 유무에 의해 구별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시장경제로 건너뛰었는데, 이로써 중국은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게 되었다. 넷째, 제4단계는 국유기업의 주식제 개혁이후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의 과정을 일컫는데, 이는 국유기업에서 수천만 명에 이르는 대량의 실업사태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는 199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신자유주의 물결의 중국판이었다. 이로써 자본-임금노동의 착취계관계가 중국에서 완성되었다. 다섯째, 2000년대 이후 중국은 WTO에 가입하여 대외무역이 증가하였고 사적 자본주의 기업이 독점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 2007년 사유재산 보호법(물권법)의 제정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승인하는 것으로서 경제적 의미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을 정치적 의미의 지배계급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 과정에서 등소평의 수정주의는 지도적 이념으로 작동했는데, 사회주의 견지, 무산계급의 독재 견지 등의 구호는 자본주의 복고를 가리는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현실을 가리는 수식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2. 중국에서 집단적 농업의 해체와 소농체제로의 전환 모택동 등 중국 공산당이 농촌을 중심으로 혁명을 한 결과, 중국에서 혁명이 승리한 이후 농업 집단화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특히 쏘련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한 결과 쏘련을 따라 배우자는 흐름이 중국에서 광범위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농업의 기계화 이전에라도 집단화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농업 생산량이 대폭 감소하였고 중국 경제 전체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농(農)·공(工)·상(商)·학(學)·병(兵)의 공동체로서 꼬뮨형의 집단농장 형태를 취한 것은 과도한 형식으로서 중국의 농업 생산력의 수준과 걸맞지 않는 것으로서 좌편향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공산풍(共産風)이 불어서 집단주의가 과도하게 강조되어, 농민들은 개인의 몫이 적어지고 공동 소유의 몫이 많아지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고, 또 단시간 내에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농업집단화에서의 좌편향은 등소평의 권력 장악 이후 집단적 농업 체제였던 인민공사가 쉽게 해체되게 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등소평은 1970년대 말 권력 장악 이후 안휘성에서 약간의 농가에 대해 개별 농가가 생산을 책임지는 농가경영책임제라는 실험을 하였는데, 이 결과 생산량의 대폭적인 증가가 있었다. 이러한 실험을 근거로 등소평은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전체 농업과 농민에게 농가경영책임제를 실시하여 사실상 소농체제로의 전환을 이루었다. 그러나 토지가 국유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소농체제인 이상 농민층 내부의 분해와 격차의 발생은 불가피했고, 또 소농체제 하에서 농민들의 소득과 도시민들의 소득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도시민들에게 제공되는 실업보험, 양로보험 등이 농민들에게는 제공되지 않아 도시민과 농민들의 소득 격차는 5:1 정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인민공사의 해체 이후 잉여 노동력으로 전환된 거대한 농민층 인구는 도시로 나가 저임금업종에 취업하여 중국 자본주의 발전을 떠받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농민공이다. 1-2억으로 추산되는 농민공들은 중국 정부에 의해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세력으로 간주되어 억압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도시의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이중적 대우를 받고 있다. 농민공들의 주거는 열악하여 방 하나에 10명 이상이 살기도 하고 지하실, 길거리에서 숙식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 호구가 농민공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결과 농민공들은 자녀들을 도시 학교에 보낼 수 없는 처지여서 농촌에 자녀를 두게 되어 가족 간 생이별이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인민공사는 농(農)·공(工)·상(商)·학(學)·병(兵)이 일체화된 체제여서 농촌에는 농산물의 가공, 유통을 담당하는 기업들이 성장했는데, 이들 기업이 인민공사 해체 이후 향진기업으로 전환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때 9000만 명에 이르는 노동력을 고용하기도 했던 향진기업은 점차 집단적 성격을 상실하였고, 권력자들의 친인척들에게 불하되는 과정을 거치고, 주식제가 도입되면서는 완전히 사적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대 중국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지역으로 변모되었는데, 이는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농촌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희생당하고,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극단화되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격을 중국 농촌이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3. 사회주의 국유기업의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의 전환과 중국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완성 1992년 등소평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제창한 이후 사회주의 국유기업을 자본주의 회사 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현대 기업제도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내세웠는데, 그 현대기업 제도는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이었다. 그리하여 국유기업을 주식제 기업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 준다’는 방침 하에 대형의 전략적 기업은 국유를 유지하고, 중대형의 국유기업은 국유와 민영의 혼합 형태로, 작은 국유기업은 사유화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주식제가 실시된 결과 기존의 사회주의 국유기업에서 기업의 지배구조였던 직공(노동자)대표대회, 당위원회, 노조의 영향력은 대폭 축소되고 유명무실화되고, 대신에 자본의 이익을 대표하는 주주총회, 감사회, 이사회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다. 즉, 기업 내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자본의 독재가 구축된 것이다. 자본의 독재! 이것이 바로 현대 기업제도 건립의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기업의 주인에서 자본주의적 피고용자로 전락되었는데, 이것의 표현이 국유기업에서 수천만 명에 이르는 대량 실업 사태였다. 이른바 국유기업의 개혁은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이었다. 기존의 사회주의 국유기업은 단위(單位)체제라 불렸는데, 이는 개별 국유기업이 단지 노동과 그에 대한 보수만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 의료, 교육, 복지, 연금 등 노동자의 사회 활동이 이루어지는 일체의 영역을 담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위복지주의라 할 수 있는 국유기업의 이러한 현실에 대해 등소평은 그것은 국유기업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고 규정하고 단위체제를 해체하고 그것을 자본주의적 회사 기업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국유기업은 경제의 30%내외를 차지하고 사영, 외자, 향진기업 등 여러 소유형태의 기업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적 자본가를 일컫는 사영은 규모가 커지면서 알리바바, 텐센트 등 독점자본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에서 실권은 중소형의 사영 기업이라기 보다는 대형의 국유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자는 당정 간부들이다. 중국 사회가 자본주의로 전환된 결과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학자들, 당간부들, 경제관료들은 중국 경제에서 10년 주기가 작동하고 있고 그 주기 안에서 성장과 침체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이들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주도의 투자 과열이 나타나고 ‘과잉생산공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과잉생산공황’의 존재는 중국 사회가 이미, 맑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 관철되는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중국 사회는 1990년대의 전환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복고가 이루어졌고, 국유의 독점기업들, 독점기업으로까지 성장하는 사적 자본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들에 대한 실질적 지배자는 당과 정부의 관료들이라 할 수 있다. 4. 결론 쏘련과 중국 등의 20세기 사회주의의 경험은 사회주의 사회는 이행기 사회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등소평의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절단하여 중국사회를 초급단계의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생산력 발전을 제일로 치고 있지만, 이는 실은 이행기 사회로서 사회주의 사회의 혁명적 성격을 거세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행기 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관계인 자본-임금노동의 착취관계가 혁명 후에 가능한 한 즉각적으로 폐지되지만, 상품-화폐 관계는 사회주의 사회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임금노동의 착취관계가 폐지되기 때문에 노동력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게 되며, 노동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전인민소유인 국유기업의 주인으로 되며, 이른바 해고의 위협이 없는 ‘철밥통’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상품-화폐 관계가 부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자본-임금노동의 사회로 복고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상품-화폐 관계를 제어하고 자본주의의 복고를 저지할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결론으로 도출된다. 쏘련과 중국에서 자본주의 복고의 원인이 된 수정주의는 쏘련과 중국에서 경제규모가 거대해지고 당 간부가 관료화되면서, 이들이 혁명성을 상실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관료주의자로, 이후에는 관료주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정주의자로서 역할 했는데, 이러한 변질의 출발점은 맑스-레닌주의적 사상을 변질시키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칙을 하나, 둘씩 수정하면서부터였다.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라는 세계사적인 반동은 바로 사상의 변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21세기 자본주의 현실을 변혁하는 새로운 운동의 정립과 발전이 사상의 재정립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적대로 인해 성립하고 발전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주체를 성장시킬 수밖에 없고, 그 모순의 운동은 끝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계급이 없는 사회, 무계급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진보의 길, 변혁의 길은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모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필요로 하며, 실천적으로는 무산계급인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기획 2편 :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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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기획 2편 :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공한 이유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1 | 조회 9967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기획 : 중국 공산당 100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2편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공한 이유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소련이나 중국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투입과 산출이 비례하는 일차원적인 경제성장이 끝난 이후 발생한 경제침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경공업의 후진성으로 인해 생필품이 부족하고 개인적 자유가 억압되어 인민들의 불만이 쌓여져 갔다. 소비품의 수입 대금으로 쓸 외화가 부족하여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서방의 경제적 봉쇄와 정치적 공작은 사회주의 국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소련과 중국은 1980년대 이후 전통적인 사회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개혁과 개방에 나섰다. ‘중국식 사회주의 발전모델’은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병행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공산당과 국가는 인적 물적 자원의 거시적인 분배를 책임지면서 사회간접시설을 구축하고 국영기업 중심으로 국내경제와 대외경제를 발전시킨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 같은 시기에 비슷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지도부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이전인 1980년대 초반부터 상해 등 중국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면서 중국식 모델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국가자본주의적 경제운영 방식을 수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서방과의 교역을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국영기업의 독립채산제, 소규모 사기업의 인정, 부분적인 민영화, 시장의 확대,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 투자 유치, 화폐사용의 확대, 무역의 개방 등은 중국의 개혁정책과 동일하였다. 덩샤오핑은 공산당과 국가를 구별하여 국사는 국가기관이 맡도록 하였다. 공산당은 다만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이러한 내용으로 헌법을 수정하였다. 고르바초프 역시 당과 국가를 구별하고 국가기관의 지위를 강화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중국과 소련 모두 과거의 사회주의 실현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중국과 공산당은 살아남았다. 따라서 사회주의 실패 원인과 국가의 붕괴 원인은 동일하지 않다. 낮은 생산력, 연속혁명의 불발, 변질된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실패원인이지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의 붕괴 원인으로 볼 수 없다. 중국과 중국공산당이 소련과 달리 개혁과 개방에 성공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중국은 소련과 달리 오랜 기간 동안 개혁과 개방을 준비하고 천천히 도입하였다. 덩샤오핑 주석은 마오쩌둥 사후 실권을 장악한 1978년부터 1993년 퇴임할 때까지 전당적 토론과 전국가적 토론을 통해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점진적으로 실시하였다. 중국모델의 기본사항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 6번의 헌법 개정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개혁과 개방의 기본원칙을 담은 헌법 초안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회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는 정치국 확대회의와 전체회의를 거쳐 전국대표대회에서 결정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국가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이 공포되었다. 1978년 헌법은 금세기 내에 중국의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 등의 4개 분야를 현대화한다는 목표를 선언하였다. 1979년 헌법 초안은 형식적으로 공산당이 아니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결정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이는 헌법발의권을 공산당이 아니라 의회가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헌법은 현급 인민대표대회에서 직접투표, 복수후보, 무기명투표 제도를 도입하였다.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발의한 1980년 헌법은 문화혁명의 잔재인 대명, 대방, 대변론, 대자보의 권리를 의미하는 ‘4대’를 폐지하였다. 1982년 중국헌법은 마오쩌둥 시기의 헌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1954년의 사회주의헌법을 토대로 하여 사실상 전면 개정하였다. 1982년 헌법은 실사구시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개혁과 개방의 기본원칙들을 선언하였다. 이 헌법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의 1인 지배에 대한 평가를 반영하여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여 권력을 분산하는 등 ‘인치’를 ‘사회주의법치’로 전환하였다. 또한 이 헌법은 경제적으로는 “중국의 당면과제를 ‘초급공산주의’로 나가가기 위한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규정하고 상품경제와 시장의 도입, 경제특구, 대외개방, 공유제 등을 도입하였다. 1988년 헌법은 사영경제와 토지사용권의 양도를 허용하였다. 반면 소련의 개혁과 개방은 1985년 마지막 혁명세대인 체르넨코가 사망하자마자 권력을 잡은 신진엘리트 고르바초프에 의해 전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달리 정치적 민주화가 아닌 경제 개혁과 경제적 자유를 먼저 도입하여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였다. 덩샤오핑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 개혁과 경제특구를 먼저 시범적으로 실시하여 개혁과 개방의 충격을 최소화하였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이상주의자였고, 덩샤오핑은 현실주의자였다. 덩샤오핑은 온갖 풍상을 겪은 혁명 1세대로 ‘흑묘백묘론’에서 보듯이 ‘사고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관념적인 이념투쟁보다 실리를 중시하였다. 반면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동시에 하는 고르바초프 방식은 경제개혁 이후 정치개혁을 점진적으로 하고자 하였던 중국의 방식에 비해 불만과 혼란을 통제하는데 더 큰 난관을 조성하였다. 고르바초프는 경제적 성과가 나기도 전에 정치적 민주화를 먼저 허용하여 경제 불만이 바로 정치적 불안으로 전환되었다. 고르바초프 역시 2007년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 사회는 변화의 속도에 견디지 못하였고, 준비 없이 사회를 너무 빨리 개방하였다”고 인정하였다. 둘째 중국공산당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민주화 시위와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초기에 유혈 진압하면서 당근과 채찍 정책을 구사하였다. 중국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베이징 소요와 당 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서기 자오쯔양을 퇴임시키고, 장쩌민을 총서기로 선출하였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에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이들의 독립 시위를 유혈 진압하였다. 다만 중국은 진압 이후에도 개혁개방정책을 지속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반면 고르바초프는 동유럽과 소련 내의 자유화 시위를 방치하였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전현직의 간부들이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며 권력의 세대교체를 성공시켰다. 덩샤오핑은 죽을 때까지 1인 독재로 치달았던 마오쩌둥의 과오를 비판하고 몸소 후계체제를 마련하고 현직에서 물러나 1인 통치를 청산하였다. 중국은 공산당 간부의 경우 60세 이상이면 중책을 맡지 못하게 하는 정년제를 운영하였고, 정부의 각료급 이상은 2차례만 연임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당과 정부는 10년마다 자연스럽게 지도부가 교체되었다. 전현직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주거지와 사무실이 베이징의 중난하이 지역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상적으로 교류하며 집단 토론 혹은 집단학습을 통해 중요 결정을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였다. 중국공산당의 경우 총서기 자오쯔양과 총리 리펑 등 새로운 지도부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실권자인 덩샤오핑은 배후에서 이들을 후견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유능한 청년 당원들을 발굴하여 이들 정치 엘리트들을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성장시켜 집단지도체제의 안정적인 권력승계를 위한 장기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상해방, 공청단, 태자당 등의 공산당 내 파벌들은 특정 파벌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서로 경쟁하였다. 그 결과 파벌간의 권력이 교체되어 비록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유지되지만 그 안에서 제한적인 권력교체의 효과가 나타났다. 반면 소련의 경우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 달리 개혁을 완수할 국가적인 지도력이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 세대교체가 실패하여 집단지도체제는 실질적으로 붕괴된 상태였다. 구 엘리트를 대변하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붕괴가 아닌 개선을 추구하였지만 옐친처럼 소련 자체를 지배도구로 인식한 신엘리트들은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반대하였다. 또한 소련공산당은 이미 정치적 지도의 권한과 의무를 1990년 헌법에 의해 포기하였다. 결정적으로 1991년 8월 고르바초프는 “옐친과 연방을 공동 통치한다”는 조건으로 연방의 공산당 조직을 해체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의 공백을 보완할 지도 중심이나 정치적 대중 주체가 없었다. 개별 공화국의 공산당 조직과 당원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몰입되어 연방을 수호할 의지가 없었다. 노동자 대중이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 순리였으나, 이러한 자발적인 노동자 대중은 관료들에 의해 사실상 질식되었다. 연방 차원의 공산당이 해체되고 연방의 집단지도체제도 없는 상태에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직접 투표로 당선된 개별 공화국의 대통령과 비교하여 민주적 정당성과 인민의 지지가 미흡하였다. 넷째 중국의 경우 소련의 러시아 민족과 달리 한족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면서 다른 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 문제에 대해 조기에 강경 진압하면서도 한족의 인구와 문화로 압도하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중국은 소수민족 밀집지역에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한족들은 지역주민으로서 지역 권력을 장악하고 소수민족을 한족 문화로 흡수하여왔다. 중국공산당은 역사 정립 사업인 공정사업을 통해 중국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소수민족들을 한족에 문화적으로 복속시키고 있다. 반면 소련의 경우 언제든지 중앙권력이 느슨해지면 연방이 해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소련연방에서 가장 먼저 탈퇴한 발트3국의 예에서 보듯이, 소련의 개별공화국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 조국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연방으로 묶인 것이었다. 개혁의 경제적 효과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공화국과 개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자, 이들은 소련 연방 자체를 불만의 표적으로 삼았다. 각 공화국의 일반 인민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경도되어 연방 체제를 소멸되어야 할 지배기구로 인식하였다. 또한 러시아 사람들은 연방체제에서 러시아가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연방에서 이탈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절대 다수의 한족을 중심으로 소수민족을 통제하고 공산당의 세대교체와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과 개방을 연착륙시켰다.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1 | 조회 9697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특집 : 노동조합을 넘어 노동운동으로 강연 : 이영주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정리 : 이용규 편집위원 강연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백기완 선생이다. 2008년 (내가) 서울구치소 출소 후 인사 드리러 갔을 때, "이제 노동이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야 한다. 노동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다.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을 사회변혁의 주체로 인정한 적이 없다. 노동은 시민권도 획득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말처럼, 노동이 주체로서 사회변혁을 만들어내야 할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 노동자가 시민의 자격, 한걸음 더 나가 사회변혁의 중심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미 노동자는 2천만을 넘어섰다. 노동자가 움직이면 체제가 전환될 것이다. 그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다들 전문가인 양 하는 게 학교와 교육인데, 모두 과거의 경험에 의존해 말한다. 노동과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나는 노동을 해봤고 노조하는 사람들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많은 이들이 아는 노동과 노동조합은 대단히 부분적인 영역이다. 우리가 모른다는 전제로 함께 이야기해봐야 한다. 운동의 위기는 좌파의 위기 작년 민주노총 선거에 후보로 나왔었다. 선거 과정에서 가슴 아픈 기억부터 떠오르는데, 좌파들에게 단결된 모습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이나 산업을 불문하고 전국의 모든 좌파들은 고립 분산되어 있었다. 한데 반대로, 조직은 무너져 있는데 활동가들 하나하나의 저력은 대단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국 곳곳의 외로운 활동가 동지들의 영향력과 저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선되지 못했지만 선거운동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2014년 한상균 위원장 선거운동 당시 가장 부담스러웠던 건, 투쟁사업장과 비정규직 동지를 만나는 거였다. 우리가 약속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나 승리를 장담 못했고 무슨 약속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이번 선거에도 많은 투쟁사업장을 다녔는데, 그 동지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적인 총전선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많이 했다. 가장 절박한 사람들은 전국적 전선의 부재를 가장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절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시대를 보내는가 하는 반성이 되었다. 운동의 위기 깊은 곳에는 좌파의 위기가 있다. 집행부, 정권, 한국 사회 곳곳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먼저 반성해야 한다. 우파들에게 구호와 성명서로만 투쟁하냐고 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다. 개인이 하는 일과 조직적 사업의 차별성이 없다. 조직적 사업이 없다. 발생한 투쟁에 열성 연대한다. 그러나 그건 발생한 투쟁에 따라가는 것이지, 좌파 조직 어디도 투쟁을 만들어 내진 못한다. 정세분석을 하지만 누구도 정세를 만들어 이끌지 못한다. 이벤트는 있으나 계급적 전선이 안 만들어진다. 이게 현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좌파 활동에서 개인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려워진 시기다. 조직적으로 살피기보다 개인 측면, 인간 성장과 교육의 측면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넘어짐을 극복해야 어린아이가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좌파활동가들의 분위기에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와 그를 통한 성장을 응원하는 문화가 없다. 좌파들은 그래서 행동을 두려워한다. 내가 과오를 일으키거나 실패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데, 그 경험은 본인이 직접 해야 의미가 있다.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인 판단과 강요는 다른 사람들에게 학습의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인간은 신뢰하는 사람에게 설득된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설득, 선전, 학습은 그 이전에 신뢰가 형성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진보적 정치조직과 노동조합이 신뢰를 받았다.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 권위가 이제는 무너졌다. 이제 조직은 신뢰도 가는 기획, 정책, 조직력을 동원해야 한다. 조직이 개인 활동가에게 해 줘야 할 지원은 그런 것이다. 그래야 개인 활동가들이 설득, 학습, 조직화를 해낼 수 있다.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핵심역량은 뭘까. '개미컴배트'를 기억하는가. 곤충의 생태적 습성을 활용해 곤충을 박멸하는 과학적 기계라는 광고를 했는데, 실상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뚜껑을 열면 바람개비처럼 날개가 있고, 한가운데 독이 든 먹이가 있다. 곤충은 주로 직진하지 후진하는 곤충이 없다는 습성을 이용한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냄새를 맡고 들어갔으면 먹이를 입에 물고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열정적인 개미는 자기 조직을 더 빨리 죽인다. 성실한 바퀴벌레는 자기 가족을 빨리 몰살시킬 것이다. 동지애가 뜨거워서 독이 든 먹이를 빨리 갖다 준 벌레는 자기 조직을 빨리 파괴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 놓여있다. 우리는 매우 열정적이고 성실하고 뜨겁고 헌신적이다. 모두가 마음과 몸이 망가질 정도로 헌신했다. 그래서 좌파 운동이 잘 됐나? 내 열정 때문에 우리 조직이 죽는 것은 아닐까? 노동운동의 역사는 사회변혁의 역사 전사회적인 대중의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건 촛불집회였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정권이라는데 왜 그 뒤로 아무것도 안하는가, 라는 물음은 잘못이다. 전사회적 촛불이 있었으니 노동자들이 주체적인 투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해방 후 전평이 한국 최초의 전국 노동조합이다. 강령을 보면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부녀자 산전산후 휴가... 마음이 답답해진다. 100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뭐하고 있나. 1946년 미군정 공보부가 한 설문조사를 보면, 노동자 뿐 아니라 전 계층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왜? 사회주의가 뭔지 몰라서? 사실 이 시기는 삶 속에서 사회주의를 배우고 지향했던 시기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이론으로만 배운다. 지금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나오지 않는 것은 학교 교육에서부터 접근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것을 좀 더 보편적으로,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접촉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87년 이후 노동자대투쟁으로 민주노조 건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노조가 2천개에서 4천개로 늘었다. 90년에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만들어졌고 90년 5월에 전국업종노동조합(업종회의)가 만들어진다. 이 두 조직이 함께 ILO 공대위를 만든다. 이 또한 답답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요구한 것이 바로 ILO 기본조약을 기준으로 한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였다. 우리는 아직도 이 투쟁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1995년 11월 11일 만들어졌다. 사회개혁투쟁, 노동법 개정 투쟁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업장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지역과 사업장을 뛰어넘는 전국 조직을 만들며 산별노조를 만들자는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민주노총 강령을 보면, 그전까지 있던 계급적 노동 해방의 요구가 '민주사회건설'로 연성화되었다. 그런데 2017년에 미국 노조 관계자들이 민주노총을 방문해서 질문한 것이 있다. 한국 민주노총은 왜 이런 식의 일을 하냐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근로개선과 임금협상을 하는 조직인데, 왜 민주노총은 그게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일을 하냐는 것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노동조합 역사와 같다고 설명을 했더니, 관계자가 미국은 이제 노동조합이 그 정도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미국은 이미 정당 내에서 노사협의가 끝나기에 사업장 수준의 요구밖에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조합 밖의 노동자들 산별교섭을 통해서 지역과 사업장을 뛰어넘는 교섭 체계 갖자는 것이 고민이었지만, 산업별로 노동자를 가둬두는 한계도 있었다. 계급적 산별운동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라는 고민이 대두됐다. 전평-전노협-민주노총으로, 그리고 민주노총 합법화와 직선제까지 왔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전진하지 못하나. 우리는 항상 제자리인가. 우리의 구호는 30년간 똑같나. 우리는 노동조합운동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우리는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 운동은 노동조합 안에, 산업 안에 갇혀 있는가. 2020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전국 노동조합 가입 인원이 250만이다. 전체 노동자의 12.5% 뿐이다. 일단, 상급단체로 보면 민주노총이 제일이다(41.3%, 한국노총 40.2% ). 사업체규모별로 보면 300명 이상 사업장에 54%가 조직되어 있다. 100~299명 사이는 8,9%, 30명 미만은 0.1%다. 민주노총이 욕을 먹는 이유가 이것이다. 정규직 대공장 귀족노조, 민주노총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거기에 해당된다. 노동자들의 사업체별 전체 노동자수를 보면, 30명 미만 사업장이 무려 940만 명이다. 300명 이상은 260만밖에 안 된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곳에서는 최대한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어려운 사업장에서는 민주노총을 욕할 게 아니라 한국의 노동기본권에 대해 저항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사회적으로 하는 이야기다. 노동조합 밖의 노동자들은 어쩔 것인지 대책이 있나? 기껏해야 민주노총은 100만이고, 노조 미가입 1750만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은 그들을 대표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나? 이것이 고민의 핵이다. 노조 밖의 노동자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580만, 비정규직이 72%. 임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 특수고용노동자 등. 이들을 포함해 계급 없는, 계급조차 빼앗긴 노동자가 한국에는 1000만이 넘는다. 노동자는 누구인가? 2006년에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천명하기를, 노동자는 고용관계 존재 여부에 기초하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은 다 노동자다. 농업노동자, 자영업자 등도 모두 단결권을 누려야 한다고 한 것. 이것이 결사의 자유다.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의 계급적 대표성과 권리를 누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것이 노동조합을 뛰어넘은 우리의 과제. 한상균 집행부 한상균 집행부를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좌파가 민주노총 집행부가 돼서 임기를 마친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한상균 집행부의 3년 사업 기조가 있었다. 첫 1년은 집행부가 한국사회 안에서 민주노총의 위치를 확보하자고 했던 시기였다. 선제총파업과 노동자서민살리기총파업을 민준총궐기로 승화시켰다. 2년차는 내부 혁신이 목표였다. 조직 내부를 확대강화하고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 이걸 기반으로 3년차는 전략투쟁에 나서려 했다. 전사회적인 투쟁을 배치한다는 것이 투쟁 3년차 계획이었다. 우리가 임기를 버티면서 유지했던 건 3년자 전략투쟁을 완성하겠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민중총궐기 직전 언론사에서 물었다. 10만이 모여 민중총궐기를 한다고 박근혜정권이 바뀔 것 같느냐?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민중총궐기로 박근혜정권은 변하지 않을 것이나, 이 경험을 통해 우리와 우리 사회가 변화할 것이다. 68혁명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현실 진단은 정확했던 것 같다. 2016년 10월 29일 민중총궐기 1년 행사가 촛불집회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게 1주년 집회였다는 것은 우리밖에 없지만. 한상균 집행부에서 제일 중요했던 건 2017년 630 사회적총파업이었다. 민주노총이 최초로 했던 비정규직 주체파업이다. 그전에는 대공장 위주의 투쟁이었다면, 최초로 비정규직 의제를 가지고 비정규직 주체가 투쟁하는 민주노총 총파업이었다. 물론 내부적 갈등이 심했고 원하는 만큼의 조직화도 안 됐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이라는 첫 발걸음이 되는 소중한 성과였다. 이게 바로 전략투쟁이다. 다음 전략투쟁, 그리고 사회변혁 문재인 정권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줬다. 한국사회 적폐 청산은 정권교체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두 확인했다. 정권교체를 넘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코로나가 주는 교훈도 마찬가지다. 한국사회의 안전과 평등은 현 체제로는 불가능하다. 체제를 바꾸자. 그러지 않고는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이 두 가지 지점에서 얘기해야 한다. 자본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강화해 나가고, 노동은 노동계급의 역사를 강화할 것이다. 노동자가 사회변혁의 주체로 서야 한다. 조직 정비와 현장 활동 복원, 민주노조 조직확대와 강화, 미조직 1750만 노동자와의 연대,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에 갇히지 않는 계급적 노동운동을 전략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 많은 선배들이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투쟁과 조직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선배들이 경험했던 투쟁이고 그들이 겪었던 조직이다. 2세대는 그들의 조직과 투쟁이 있어야 하고 그게 그들을 성장시킨다. 현장에 가보면 87년 투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의 동지들은 민중총궐기와 촛불을 이야기한다. 그들을 성장시킨 경험이기 때문이다. 조직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수많은 현장조직과 정치조직이 그렇다. 민주노총이 목적이 아니라 노동해방이 목적이니까. 우리의 투쟁은 바로 오늘 이 조직이 아니라 사회변혁이다. 조직보위론으로 빠지는 것은 우리의 투쟁을 우리 스스로 가두는 것일 터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길을 만들어야 한다. 절박하지 않으면 핑계를, 절박하면 길을 만든다. 우리가 가는 곳이 길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콩나물 시루에 물 붓는 것 같은 일이다. 지난하게 일하고 투쟁하는데 우리는 제자리인 것만 같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들이 수많은 구멍들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콩나물은 어느 순간 자란다. 우리의 운동이 이런 것이다. 하루하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나아가자. 우리가 함께해야 할 전략투쟁을 고민해야 할 때다. 감사하다.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1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1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1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1 | 조회 9267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역사 : 경성의 재발견 01 업로드 중입니다.

Date 2021.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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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정세 : 7월의 정세 -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기원’이 가리고 있는 것들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정세 : 7월의 정세 -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기원’이 가리고 있는 것들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정세 : 7월의 정세 -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기원’이 가리고 있는 것들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1 | 조회 9089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정세 : 7월의 정세 -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기원’이 가리고 있는 것들 김석정 편집위원/정책위원회 의장  2020년 시작과 함께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많은 익숙한 것들과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았던 것들을 바꾸어 놓았고,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또한, 리오데자네이로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만든 미국의 허리케인과도 같은 의외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직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지난 일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지식은 늘어났으며,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방백신과 치료제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어떤 방역체계가 잘 작동하는지 아닌 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경험들도 쌓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 바이러스의 창궐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하는 점에 대한 단초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몇 회에 걸쳐 이러한 단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0세기 최악의 팬데믹으로 3천만에서 1억명 사이로 추정되는 사망자를 낳은 스페인 독감이 사실은 스페인이 아닌 미국 또는 영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입증하려는 논문들이 많이 있다. 여러가지 역학 증거들을 바탕으로 기원을 추적해 본 것이다. 이번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다시 한번 기원 논쟁이 불붙었다. 2020년 12월 말 이후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대규모로 환자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우한시를 봉쇄하고 질병의 전파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런 조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을 굳혔다. 또한, 3월 이후 유럽 및 북미 주요국들에서 확진자들이 발생하자 결국 중국의 방역 실패가 전세계에 팬데믹을 불러왔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아직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강력한 반중국 정책을 펴고 있던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우한 바이러스 실험실 유출설을 제기하며 중국을 압박하였다. 미국과 그에 동조하는 국가들과 중국과의 긴 논쟁끝에 국제보건기구(WHO)는 중국 우한에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올해 3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실험실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연구소 유출이 자연 발생설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언급하자, 미국 식품의약국(FDA) 자문위원과 국립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은 각각 가장 가능성 높은 설명은 동물 숙주로부터 인간으로 옮긴 자연 진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코로나 19 실험실 유출설에서 조금 떨어져 중미관계 전체를 돌아보자.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며 선거전을 펼친 끝에 등장할 수 있었고, 집권기간 내내 중국과 무역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의 긴장 관계를 지속하였다. 물론, 중간에 조금씩의 타협을 이루어내며 긴장 관계가 파국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양국간의 무역 전쟁은 불공정 무역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중국산 물품에 대한 관세 인상에서 촉발되었고, 다시 첨단 산업에 대한 수출 규제 정책으로까지 나아가 전면적인 경제 패권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핵심은 세계적인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을 자국 위주로 구축하려는 전략적인 충돌이다. 바이든 행정부 등장 이후, 이러한 정책은 미국과 이해를 같이한다는 국가들, 즉 유럽, 일본, 대만, 한국 등의 기업을 본국에 유치하여 미국 중심의 가치사슬을 완성하려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 관계의 맥락에서, 2020년 초에는 ‘우한의 실험실에서 유출된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무책임한 중국 정부의 대책으로 인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7월 1일부터는 국가안전법(“홍콩 국가보안법”)을 시행하며 ‘홍콩 인민들의 자유를 박탈’하였으며, 신장 자치구의 위구르 소수민족을 재교육 수용 시설에서 ‘성폭행과 고문을 자행하여 인권을 탄압’하는 등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로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나아가며, 미국은 체제의 도덕성과 정통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즉,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기존 경제적 측면에서의 긴장 고조에 더하여, 미국의 ‘동맹’에 대하여‘가치’를 함께 하는 국가인 미국과 함께하고 중국과 선을 그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실험실 유출 주장은 그 주장의 사실 입증 여부에 관계 없이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도덕적 압박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고,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러서는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을 재구성하는데 하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역학적 측면에서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다음 팬데믹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지만, 이미 하나의 선전 재료로 변해 버린 이런 주제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팬데믹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인민대중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공성을 강화하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는데 나서야 할 것이다.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사람 : '공공교통을 다시 디자인하다' 김덕성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사람 : '공공교통을 다시 디자인하다' 김덕성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사람 : '공공교통을 다시 디자인하다' 김덕성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2 | 조회 9425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사람 : '공공교통을 다시 디자인하다' 김덕성 안보영, 적야 편집위원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에서는 지역현장에서 교통을 의제로 사회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김덕성 당원을 만났습니다. "버스)공영제라는 것은 국가가 주도해서 교통을 디자인하는 거예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통 이용권 같은 것을 국가가 디자인 할 수 있습니다."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도서 : 조직구성원 모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도서 : 조직구성원 모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도서 : 조직구성원 모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2 | 조회 9634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도서 : 조직구성원 모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정상천(경기중부당협) “많은 조직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만연한 동기부여 부족 현상은 불평등한 권력 배분이 초래한 황폐한 결과다.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에게 일터는 자아를 표현하는 즐거운 장소이며, 동지애가 깃들어 있는 의미 있는 목적을 추구하는 곳이 될 수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곳은 그저 힘들고 단조로운 곳일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을 저자의 도발적인 물음은 매혹적이다. “만일, 권력이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조직을 설계할 때 모든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고, 아무도 권력을 못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어 권한이양 자체가 필요 없게 하는 조직구조와 관행들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도발적인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더 매혹적이다.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구조나 관행들을 만들어서 권력불평등의 오랜 문제를 극복하는 것인데 역설적이게도 조직 전체가 좀 더 강력해지는 결과가 일어난다.” 조직과 관련된 가장 원초적인 질문은 ‘사람들은 왜 조직을 만들까?’다. 답은 여럿이겠지만,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타인과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협력은 힘의 극대화로 이어져 조직이 설정한 과업을 보다 용이하게 해결할 힘을 준다. 이 책은 과업을 이루기 위해 조직의 힘을 극대화하는데 성공한 조직들의 구조와 관행, 문화를 다룬 연구보고서다. 이 책에서 다룬 조직은 4만여 명의 영리조직부터 7천여 명의 비영리조직, 학교와 병원 등도 포함되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 목적이 무엇이든 조직에 대한 애정과 실망 정도에 따라 참여나 기여의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협력의 힘을 높이기 위한 조직의 구조와 문화 형성은 늘 조직의 화두다. 저자는 인간의 의식발달에 따라 조직모델이 발달해 왔다고 주장하며 조직의 발달단계를 이름과 색깔을 붙여 소개한다. 반응적 단계를 상징하는 적외선 패러다임 - 마법적 단계를 상징하는 자주색 패러다임 - 충동을 상징하는 적색 패러다임 - 순응을 상징하는 호박색 패러다임 - 성취를 상징하는 오렌지 패러다임 - 다원주의를 상징하는 그린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각 패러다임에 대응하기 위해 발달한 조직을 적색 조직 - 호박색 조직 - 오렌지 조직 - 그린 조직 - 청록색 조직이라 부른다. 이 책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조직발달 단계를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위계적이고 문화를 없애야 한다거나, 리더십을 강화해야 한다거나 하는 차원의 이야기도 훨씬 뛰어 넘는 내용이 많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 진화해 갈 방향이 궁금한 이들이나 기존의 조직운영 방식에 회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은 복잡해지는 사회에 적응(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켜 왔다고 한다. 일종의 진화다. 사회변화에 대응(적응)하지 못하는 조직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사회 전체의 생태계로 보면 조직이 흥하고 쇠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조직 안에서 보면 운명이 걸린 절박한 일이기에 조직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조직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근거가 틀렸을 때, 협력의 극대화를 가능케 하는 조직의 경영(운영)에 실패했을 때,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제안(상품, 서비스, 정책 등)을 하지 못할 때 조직은 쇠퇴한다. 훌륭한 존재이유를 가진 조직이라도 조직을 움직이는 일이 사회변화 흐름과 맞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어떤가? 복잡해지는 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대응(적응)할 수 있는 조직으로의 변화(진화)를 고민하고 있는가? 협력의 에너지를 높이는 구조와 문화를 구축하고 있는가? 기존에 존재하는 실체와 싸워서는 기존의 것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무엇을 변화시키려거든 기존 모델을 쓸모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라. - 리차드 벅심스터 풀러 -

Date 2021.07.31  | 

By 미래에서 온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영화 : 저주받은 마을 쉐이디사이드의 숨겨진 이야기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영화 : 저주받은 마을 쉐이디사이드의 숨겨진 이야기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 영화 : 저주받은 마을 쉐이디사이드의 숨겨진 이야기
미래에서 온 편지 | 2021.07.31 | 추천 2 | 조회 12356
■ 미래에서 온 편지 35호(2021.07.) □ 영화 : 저주받은 마을 쉐이디사이드의 숨겨진 이야기 <피어스트리트 3부작> 박수영 작은 시골마을 “쉐이디사이드”에서 해골 가면을 쓴 살인마에 의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다. 30년 이상 폭력범죄가 전무한 이웃 부촌 “써니베일”과 달리 연속해서 연쇄살인마가 등장하여 “살인마의 수도”란 별칭으로 불리는 쉐이디사이드는 완전히 슬럼화된 상황이다. 쉐이디사이드의 주민들은 정착지 시절 교수형당한 “마녀” 세라 피어의 저주가 또다시 시작되었다며 수군거리며, 써니베일 주민들은 이웃 마을의 비극을 보며 무기력한 주민들을 냉소하며 비웃는다. 쉐이디사이드에서 살다가 최근 어머니와 함께 서니베일로 이사한 여고생 샘은 우연한 계기로 “마녀의 저주”를 받아 되살아난 연쇄살인범들의 표적이 된다. 쉐이디사이드 시절 샘과 단짝이었던 디나는 친구 샘을 마녀의 저주로부터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그 과정에서 마녀의 저주에 관한 숨겨진 진실을 하나씩 알아내게 된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호러영화 시리즈인 <피어 스트리트>는 아동용 호러소설 시리즈인 “구스범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R. L. 스타인의 동명의 시리즈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총 3부작의 시리즈 영화이다. 파트 1은 1994년의 해골가면 살인마 사건을 시작으로 샘과 디나가 마녀의 저주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리며, 파트 2는 1978년의 캠프 나이트윙 학살사건을 다루며 파트 1 마지막 부분에서 샘과 디나가 찾아낸 마녀의 저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신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트 3는 1666년으로 돌아가 파트 1, 2를 통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녀 전설의 진실을 보여준 후, 모든 진실을 파악한 샘과 디나, 신디가 마녀의 저주를 풀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은 호러, 그 중에서도 슬래셔 장르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1994년을 그리는 파트 1은 그 시기 유행했던 <스크림> 류의 뉴 슬래셔 영화의 규칙을, 1978년 사건을 다룬 파트 2는 <13일의 금요일> 같은 전통 슬래셔 영화을 충실히 재현한다. 파트 3는 1666년 마녀사건을 다루는 전반부와 모든 진실을 알아낸 1994년의 주인공들이 쉐이디사이드의 저주를 해결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위커맨>, <미드소마> 스타일의 포크 호러, 후반부는 다시 뉴 슬래셔의 분위기로 돌아간다. 전통적인 호러, 그 중에서도 <13일의 금요일>, <스크림> 등의 슬래셔 영화의 공식에 충실히 따르는 이 시리즈영화의 미덕은 이런 “난도질”의 배경이 어디서 왔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 있다. “써니베일”, “쉐이디사이드”라는 마을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주된 동기는 같은 출발점을 가진 두 마을이 (두 마을은 모두 1666년의 “유니언”이라는 정착지에서 시작된 마을이다) 한쪽만 승승장구하고 다른 한 쪽은 계속 쇠퇴하게 되었는지를 계속하여 질문한다. 각 애피소드는 쉐이디사이드의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 상반된 방법을 사용하는 두 캐릭터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정체성을 부정하며 써니베일의 일원처럼 행동하는 것과 정체성을 내면화해 써니베일에 반항하는 것이 두 방법인데, 파트 1의 “샘”과 파트 2의 “신디”가 전자, 파트 1의 “디나”와 파트 2의 “지기”가 후자이다. 이러한 상반된 대응은 번번히 실패하게 된다. “샘”과 “신디”가 아무리 환심을 사고자 노력해도 써니베일의 구성원들은 그들을 “쉐이디사이드의 실패자”로 볼 뿐이며, “디나”와 “지기”의 감정적 반항은 쉐이디사이드가 더욱 소외되어야 할 이유가 될 뿐이다. 영화는 “샘”과 “디나”, “신디”와 “지기”가 힘을 합쳐 “마녀의 저주”라는 시스템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들의 시도는 비록 해당 에피소드 내에서는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이들의 작은 시도들은 파트 3에서 하나로 모여지며 결국 모든 음모를 드러내 주게 된다. 청소년들이 주축인 모험 영화의 외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인 <기묘한 이야기>가 많이 연상되기는 하지만 표현 수위는 꽤 높은 편이다. 특히 파트 2의 수위가 꽤 높은데, 오직 부촌인 써니베일의 아이들은 제쳐놓고 오직 쉐이디사이드의 아이들만 노리는 살인마의 행동은 정서적 충격도 상당하다.

Date 2021.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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