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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 역사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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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재창당을 완료한 노동당은 2014년 지방선거 준비 체제로 돌입했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떤 유의미한 전략이 가능한 지에 대한 당 내 논쟁이 일었다. 이용길 지도부는 정치적 시민권을 재획득한다는 목표로 광역의원 집중 출마 방침을 정했다. 광역의원 지역구 선거에 다수 출마해 전국 합산 득표 2% 이상을 달성하여 국고보조금 지급 대상이 되자는 소위 '2% 전략'을 입안한 것이다. 당 내 논란을 거친 끝에 이 같은 전략을 결정하고 다수의 후보를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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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의원 지역구 후보 70명 출마라는 목표는 달성했으나 득표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2014년 지방선거는 노동당 뿐만 아니라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도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진보진영 전체가 부진을 면치 못한 선거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노동당은 2014년 7월 재보궐선거에 역량을 집중해 대응했으나 역시 저조한 득표에 그쳤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를 거치면서 당 내 일각에서 진보정치 재편에 관한 전당적 토론 요구가 제기되었다. 이는 당 내 일부 인사들에 의해 사실상 정의당과의 통합까지 고려한 노선 전환 요구로 이어졌다. 당은 또다시 통합이냐 독자노선이냐의 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2014년 11월 정책당대회에서 당 진로 논의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어서 12월부터 시작된 6기 대표단 선거에서도 진보정치 재편에 관한 의견에 따라 후보 구도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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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015년 1월 통합을 공약으로 제시한 나경채 후보가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이후 나경채 지도부는 진보정치 재편을 추진했다. 그러나 2015년 6월 정기당대회에서 통합을 위한 당원총투표 부의 안건이 과반 득표에 미달하여 부결됨으로써 재편 시도는 무산되었다. 나경채 대표를 비롯한 재편파 지도부는 사퇴했으며 통합을 요구하는 당원들과 함께 집단 탈당했다. 
2015년 9월에 7기 대표단 선거를 실시해 알바노조 위원장 구교현 후보를 새로운 대표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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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분열 사태 속에서 출범한 구교현 지도부는 이후 한 달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4분기 사업계획을 수립했다. 4분기 사업계획은 박근혜 정부의 소위 노동개혁이 국정과제로 제기된 상황에서 노동개악을 저지하고, 노동당의 의제를 제기하여 총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정세에 대응하는 것이 전반적인 기조였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 드라이브에 맞서 국민투표운동, 탈옥선 전국순회 및 3주간의 집중행동, 국회 앞 48시간 연속 정당연설회 등을 연말까지 꾸준히 진행했다. 이는 분열 사태에 의해 위축된 당 내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노동개악 관련법 연내 통과를 저지하는 흐름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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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016년 4월에 20대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되었다.

노동당의 총선 전략은 전략지역구 집중 방침과 비례대표 득표라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었다. 노동자 밀집지역을 전략지역구로 선정하여 지역구 당선을 목표로 하고, 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의 축이나 다름없었다. 일반지역구 후보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정당투표에서의 유의미한 득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전략지역구 당선이 실질적인 목표라고 볼 수 있었다.


전략지역구는 애초에 울산 동구와 경남 거제 두 곳을 목표로 했다. 거대 조선소를 기반으로 하는 두 지역구에 총선 성패가 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거제에서는 끝내 출마가 무산되었다. 결국 울산 동구 한 곳만 출마하게 되었다. 이갑용 울산시당 위원장이 전략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다.


유일한 전략지역구의 성패는 후보단일화에 달려있었다. 문제는 후보단일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만한 지렛대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역구 후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중 전략지역구는 울산 동구 하나뿐이었다. 전국적 구도를 놓고 협상하기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빈약했다. 그런 처지에서 현대중공업 조합원 투표로 단일후보를 결정하자는 제안이 왔다. 별다른 조건을 제시할 만한 지렛대가 없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 여론조사로 시행된 조합원 투표 결과 무소속 김종훈 후보를 단일후보로 결정했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애초의 합의대로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고 당사자들에게도 전달되지 않았기에 지지율은 알 수 없었다. 사실상 유일한 총선 전략이 좌초되는 충격적인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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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이 치러졌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폭정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어 여소야대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노동당의 성적은 예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비례대표 정당투표 0.38% 득표라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


노동당은 총선 참패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평가와 전망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총선 평가만 작성하고 전망은 수립하지 못했다. 정파 대립에 따른 내분까지 겹쳐서 혼란은 극심해졌다. 결국 7기 대표단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이르러 7월 전국위원회 자리에서 총사퇴하기로 결정했다. 단지 총선 결과에 따른 책임만이 아니라 정파 대립에 의한 분란과 파행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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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대책위원회를 거쳐 10월에 8기 대표단 선거를 실시했다.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 울산 동구청장 등을 역임한 이갑용 후보를 새로운 대표로 선출했다.


8기 대표단은 출범 직후부터 비상한 정세에 직면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폭로되면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고 촛불 항쟁이 벌어졌다. 노동당은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총력 투쟁에 나섰다. 노동당의 투쟁은 박근혜 정권을 종식시키는 역사적 사건에 일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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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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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1990년 11월 민중당이 창당했다. 한국전쟁 이래로 단절되었다가 1980대에 부활한 사회주의 세력이 정당 형태로 정치세력화를 시도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민중당 상층부에는 훗날 보수정치로 건너간 '유명인'들이 포진했으나, 기층 조직은 한국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양자 간의 갈등은 창당대회 당시부터 드러났는데, 결국 1991년 5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민중정당' 노선을 주장하는 흐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은 제명되었다. 

1992
1992년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 결과를 본 명망가들은 당을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구성해 준정당적 조직 형태를 유지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밖에도 진보정당운동 재건을 시도하는 몇 가지 흐름의 조직들이 있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출신 인사들은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라는 공개 조직을 만들었고, 명망가들이 지배하던 시절 민중당에서 제명된 인사들이 주축이 된 ‘민중회의’도 있었다. 이 조직들은 1992년 대선에서 독자적 민중후보를 내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에 따라 백기완 후보가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1%, 23만표 득표라는 썩 좋지만은 않은 결과였다.

92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선생. ⓒ 오마이뉴스 이종호.jpg

민중후보운동의 성과를 기반으로 다시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통합해 민중정치연합을 결성하고, 이들이 다시 진정추와의 통합을 모색했다. 약간의 이합집산을 거쳐 통합이 이뤄져 진보정치연합이 탄생했다. 

1996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진정추 출신 일부 인사들이 개혁신당 노선을 통해 민주당에 참여함으로써 분열이 있었다. 이후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1996년이 다 갈 때까지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을 만드는 데에 실패한 상태에 놓였다.
1996년 연말에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날치기 통과에 대항하여 양대 노총의 총파업이 벌어졌다. 실로 ‘총파업’이라는 이름에 값하며 노동운동의 위력을 과시하는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정치세력화 논의가 본격화했다. 

1997
1997년 대통령 선거는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민주노총은 개혁적 국민정당의 주체가 되리라는 점과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후보를 출마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절박한 상황에서 모처럼 한국의 사회운동세력이 한 자리에 모여 1996년 노동법 투쟁으로 인지도를 높인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후보로 추대해 '국민승리 21'을 결성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국민후보' 전술에 동의할 수 없었던 한국노동청년연대는 논의에서 철수했다. 이들의 우려는 선거 과정에서 현실화했다. 이른바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강경파들이 이탈하고,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자 전국연합이 선거운동을 사실상 방기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는 1.2%, 30만표의 저조한 득표를 거뒀고, 정권은 교체됐다.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으로 복귀하지 않고 1999년 실업극복국민운동 등을 추진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가져온 아픔을 함께 극복해보자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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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애초 국민승리 21에 참여하지 않았던 한국노동청년연대는 1998년 독자적으로 청년진보당을 창당했다.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원탁회의, 진보정당 창당 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민주노동당 창당 절차에 사실상 돌입했다. 

1999
1999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진보정당을 창당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룬다는 정치방침을 결정했고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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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민주노동당은 강령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했으며 진성당원에 의한 당비로 운영되고 조직 원리에서부터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이념적 대중정당을 지향했다. 

2001
2001년 전국연합이 조직적 결의를 통해 대거 입당하면서 정파연합정당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성격은 창당 직후부터 각 지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파들 간의 경쟁으로 귀결됐으며 이에 따른 온갖 부작용이 나타났다. 정파들이 조직 장악을 목적으로 집단으로 지구당에 입당해 집행부를 장악하는가 하면 자파의 후보를 선거에 출마시키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고 없는 조직을 선관위 등에 허위로 신고하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의 온갖 기행을 정리하는 것은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2002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 정당투표에서 8.13%를 득표했으며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권영길 후보 출마를 통해 95만표를 얻는 성과를 올렸다. 

2004
마침내 2004년 총선에서는 8명의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2명의 지역구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치러진 지도부 선거에서 소위 자주파 그룹이 당권을 장악하고, 비주류가 된 정파들이 평등파 그룹을 형성하면서 고질적인 정파구도가 고착화했다. 
양대 정파의 대립은 조직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책적 차원에서도 일정한 퇴행을 불러왔다. 자주파 지도부는 당시 참여정부와 전면적으로 대립하기보다는 일정한 조건 하에서 협력하며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과업을 완수하려 했다. 반면 평등파 그룹은 10명의 진보정당 소속 의원이 원내에 진출한 효과를 대중에 체감하게 해야 한다며 민생입법에 주력할 것을 요구했다. 이 논쟁으로 내내 몸살을 앓다 치러진 2006년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 그룹은 근소한 차의 승리를 거둬 당권을 유지했다.

2007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은 고질적 정파 대립 구도를 극복할 기회로 여겨졌다.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이라는 인물 대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파 그룹이 당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고 2006년 지도부 선거 당시와 가까운 표차로 승리를 거두자 퇴행적 정파 구도는 오히려 심화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권영길 후보가 2002년보다 못한 71만표 득표의 초라한 성과를 거두자 바야흐로 당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평등파 일각에서 제기됐다. 이러한 주장은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 중심으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났다.
당시 대선 패배는 내부요인과 외부요인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외부요인으로는 참여정부 시기 진보정치가 독자성 확보에 실패해 참여정부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진보정치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의 출마로 불리한 구도가 형성됐다는 점도 큰 원인이다. 내부요인으로는 '대권 삼수생' 이미지의 노쇠한 후보 전술이 정파적 이유로 통용됐다는 것과 '코리아 연방 공화국'과 같은 편향된 구호 및 정책의 문제를 주요하게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은 결국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이념적 조직적 노선이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노선을 만들고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나 문제의식과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평등파 그룹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노선으로 분화했다. 이른바 신당론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낡고 모호한 진보정치 노선, 정규직에 편향된 노동정치 노선에서 온 것으로 진단했다. 따라서 비정규직, 소수자, 녹색의 가치를 중심에 놓은 노선을 재구성해야 하며 북한에 대한 태도를 재설정하고 낡은 진보정치노선과 결별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해법이었다. 반면 혁신론자들은 위기의 원인은 자주파의 친북노선이 일심회 사건 등에 의해 외화된 것, 민주노총에 의존해온 것, 국민과 동떨어진 운동권 정당의 모습을 바꾸지 못한 것에서 찾았다. 따라서 이들의 해법은 일심회 사건 관련자들을 제명하고 '제2의 창당'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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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패배를 책임지겠다며 사퇴한 자주파 집행부를 대신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 운영을 책임지게 된 심상정 의원은 혁신론자들의 주장과 같은 내용의 '혁신안'을 만들어 당대회에서 통과시키는 걸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2008
2008년 2월 당대회에서 자주파 그룹이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에 사실상 반대하고 심상정 비대위원장이 사퇴하면서 분당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이후 신당론자들과 혁신론자들이 신당 창당 방식 등을 두고 일정하게 대립하는 등의 혼란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2008년 총선 대응을 위한 진보신당 연대회의 창당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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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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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사회당의 전신(前身)인 청년진보당은 1998년 11월 29일 창당했다. ‘국민후보’ 전술에 동의할 수 없어서 ‘국민승리 21’에 참가하지 않았던 한국노동청년연대가 창당의 주축이었다. 청년진보당은 2000년 1월 창당된 민주노동당보다 앞서서 창당되었다. 당명에 청년을 덧붙인 것은 창당발기인들의 연령과도 관련되겠지만 완결된 창당이 아니라 앞으로의 진보좌파통합당을 위한 준비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창당 시 당의 이념적 지향을 분명히 하는 강령을 제정하는 대신에 "당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의 방향과 계획"으로서 노동, 정치, 대외 관계, 한반도, 차별 철폐, 복지, 생태의 7대 분야의 '실천 강령'만을 채택하고 “대안 사회에 대해 어떤 사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인다는 연대의 정신"을 강조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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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청년진보당은 1999년 3월 서울 구로(을) 재선거에 참여하여 대중적으로 당의 존재를 알렸고 2000년 총선에 ‘청년좌파’라는 슬로건으로 서울의 전 지역구와 인천 부평(을)에 46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총 12만 5천여 표를 얻어 평균 3.07%의 득표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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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청년진보당은 2001년 8월 제3차 당대회를 통해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당의 정신을 표현하는 양대 기치로서 ‘반자본주의’와 ‘반조선로동당’을 채택한다. 당명을 개정했음에도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지는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강령은 양대 기치에 동의하는 광범위한 세력과 함께 제정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1년 10월 구로(을) 재선거에서 사회당 후보가 민주노동당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자 사회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대두했고 2001년 12월 민주노동당이 합당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2002
2002년 상반기에 이루어진 합당 논의는 2001년 9월 전국연합의 결의로 소위 ‘민족해방파’가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한 상황에서 ‘반조선로동당’ 문제에서 양당이 접점을 찾지 못한 채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 직전에 결렬되었다. 한편 동시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의 정당득표율은 1.6%(총 261,847 표)에 머물렀고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8.1%를 획득하여 양당 간의 우열이 분명해졌다. 동시지방선거 이후 제16대 대통령선거까지 사회당은 과거 ‘국민승리 21’에 참여하지 않았던 현장파 노동운동 및 민주노동당 외부의 제 좌파세력과 대선공동대응 및 조직통합을 추진했지만 제한된 시간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또한 독자적으로 대응한 제16대 대통령선거 이후 저조한 득표율과 2002년 일 년 내내 계속된 정치협상의 실패로 사회당은 한 동안 혼돈과 내분, 활동의 정체와 활동가 유실에 휩쓸린다. 

2003
2003년 5월의 당대회는 이와 같은 과정이 일단락되고 당이 일정하게 재건된 계기였다. 재건의 출발점은 강령의 개정이었다. 2001년∽2002년 시기의 사회당은 비록 청년진보당의 ‘실천강령’을 존치하고 있었으나 강령에 준하는 문서들을 통해 ‘반자본주의’와 ‘반조선로동당’이라는 양대 기치 이외에도 ‘사회당의 사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밝히고 있었는데,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 "지역과 국경을 넘어선 평등한 연대", "참여와 자치가 보장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를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2003년 5월의 사회당 당대회는 강령을 새로 채택하고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넘어서서 생태적이며, 평화적이고, 자치적이며, 연대적인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힌다. 2003년 강령은 사회당이 추구하는 당의 형태를 '사회주의 대중정당'이라 밝힘으로써 2001년∽2002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중정당화를 위한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선언했지만, 실제의 활동은 정당활동보다 부문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운동이 주목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운동, 장애인운동, 탈핵운동 등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사회당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으로 자신의 가치 지향을 표현했으며 "가장 차별받고 가장 배제된 사람들과 가장 먼저 연대"하는 '연대 정당'으로 자신을 규정했다. 

2003년 5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이르는 약 3년 반의 시기 동안 많은 당원들이 당 활동보다 노동자운동단체, 장애인단체, 환경단체 등에서 활동하면서 정당운동이 일정하게 공동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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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사회당은 당의 공동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2006년 10월 당대회를 열어 강령을 개정하고 지도부를 새로 선출했다. 증대하는 원심력을 극복하고 부문 의제와 보편 의제를 결합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노력했다. 다른 단체들과 함께 ‘사람연대’ 구성에 착수하여 2007년 5월에 본 조직을 출범시켰다. 2006년 강령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 원리를 “배제적 통합”으로 규정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역에서의 탈(脫)배제 운동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을 당의 정치적 목표로 보았다. 이는 정치, 경제, 시민 사회에 걸친 3대 탈배제 강령과, 동북아 비핵평화체제 및 평화국가론에 근거한 평화 강령, 생태 사회로의 전환 강령으로 구체화된다. 2003년 강령이 대안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선언의 성격이었다면, 2006년 강령은 보편적 의제를 통한 개입, 한국 사회의 현재를 규정하는 1953년 체제, 1987년 체제, 1997년 체제를 뛰어넘는 사회적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의 경로와 체제 대안에 중심을 두었다. 이와 같은 강령 개정, 조직 정비, 사람연대를 통한 구심력의 확보 등에는 단지 사회당을 재정비하는 것을 넘어 민주노조운동의 약화와 진보정치의 위기 속에서 전체 진보를 재구성하기 위한 내적 준비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다. 실제로 사회당은 2007년 7월에 대선 참여를 공표하면서 “대선에 임하는 목표는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이라고 밝혔고 선거운동 종료일에도 “대안 중심 진보재구성”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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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사회당의 의지나 역량과는 무관하게 진보의 재구성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기도 했다. 2008월 1월 민주노동당 선도탈당파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발족시켰다. 이와 같이 변화된 정세에 사회당은 선도탈당파와 함께 토론회를 여는 등 “대안 중심 진보재구성” 기획을 이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2월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혁신안이 부결되고 혁신파들이 대거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면서 진보재구성의 중심은 혁신파로 넘어갔으며 4월 총선에 대응하기 위한 임시적 틀로서 진보신당연대회의가 창당되자 사회당을 포함하는 재구성의 문제는 4월 총선 이후로 미루어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이 매듭지어질 시점에 사회당은 또 한 번의 내부 갈등에 휩싸인다. 당 대 당 통합의 논의가 4월 총선 이후로 미뤄진 상황에서 당의 해체와 진보신당연대회의로의 개별 입당이라는 주장이 등장했고 그 결과 또 한 번의 활동가 유실이 발생했다. 다만 2003년 초처럼 대규모 이탈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탈배제 강령과 기본소득에 대한 당원의 폭 넓은 동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당 지도부가 2012년까지 이어지는 정세 판단 속에서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대안 중심 진보재구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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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이후 사회당은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의 변화된 상황과 정세를 반영하여 2009년 11월 강령을 새로 개정하고 기본소득 강령을 부속강령으로 채택한다. 이 시기를 사회당 역사의 네 번째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세 번째 시기와 운동의 목표나 성격에서 차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시기에 확립된 내용을 의제운동을 통해 구체화해 나갔던 시기이다. 사회당은 2009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창립에 많은 당원들이 참여함으로써 기본소득운동을 사회화했으며 주요 의제운동으로서 금융수탈반대운동과 최저임금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와 같은 의제운동을 “대안 중심 진보재구성”으로 연결하고자 시도했는데 2010년 지방선거 및 은평(을) 재선거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2010
사회당의 진보재구성을 위한 노력은 2010년을 경과하면서 또 한 차례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사회당이 2010년 이후의 진보대연합 논의에 임하는 원칙은 호황기에나 가능했던 복지진보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를 종식하는 경제체제 전환을 목표로 하여 세력의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여기에서 불안정노동체제 종식, 기본소득 도입, 금융수탈체제 해소 등은 경제체제의 전환을 위한 중심적인 수단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진보대연합 논의에서는 이러한 대안 논의보다 소위 ‘민족해방파’와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복고적인 논의가 더 중심적이었고, 그 이유는 진보대연합 논의가 민주노동당의 복원을 중심으로 국민참여당 및 사회당 등 좌우로의 확장을 꾀하는 기획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논의가 대안 중심이 되려면 진보신당과 사회당만이 참여하는 테이블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사회당은 이처럼 복고적이고 세력연합적인 목표로 시작된 진보대연합에 대해 새로운 좌파연합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보았다. 

2012
진보대연합 국면에서 사회당은 진보신당 내의 ‘독자파’와 함께 새로운 진보좌파 정당을 구성하는 길을 선택하여 2012년 3월 진보신당과 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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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합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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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진보신당은 2008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시급히 창당 일정을 진행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민주노동당을 탈당했으나 새로운 당에 결합하지 않은 인사들에 대한 조직은 이후 실질적 창당을 통해 실현한다는 취지의 '2단계 창당론'이 제시됐다. 같은 해 3월 한국사회당에서 활동하던 일부 당원들이 조직적으로 이탈해 진보신당에 합류했다. 진보신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전략명부를 구성하고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지역구에 출마하는 등 노력했으나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노회찬, 심상정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고, 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서 2.94%를 득표하여 0.06% 차이로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이후 원내 진출 실패를 아쉬워하는 이른바 ‘지못미’ 현상이 나타나고 광우병 파동 촛불시위를 통해 입당한 당원 숫자가 늘어나면서 진보신당은 새로운 동력을 확보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당 외의 노동운동 세력 등을 합류시키기 위한 제2창당 관련 논의가 진행됐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제2창당 일정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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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급조된 공동대표제 등의 과도기를 마감하고, 2009년 3월에 당헌과 강령을 제정하고 노회찬 (단독)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제2창당을 대신했다.
2009년 4월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있었다.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한 조승수 후보가 본선에서 당선되어 진보신당은 원내 정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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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이명박 정권의 실정과 폭정에 의해 2010년 지방선거는 광범위한 '반MB연대' 구도로 치러졌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노회찬 후보는 완주했으나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심상정 후보는 민주당과 단일화한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이 사건으로 당의 조직진로에 대한 논란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진보신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 정당득표 3%를 넘김으로써 2008년 총선보다 근소하게 향상된 결과를 얻었다. 그럼에도 당내 유력 정치인들은 선거 결과와 당의 전망에 회의를 품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장기적 발전 전망과 그에 따른 진로에서의 관점 차이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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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혼란 속에서 조승수 의원을 대표로 한 3기 지도부가 출범했으나 조직진로에 대한 백가쟁명이 시작된 이상 안정적 운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당내 주요 파벌들은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대통합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그럴 경우 국민참여당을 통합 대상에 포함시킬 것인지, 아예 민주당까지 포괄하는 '민주대연합' 노선으로 전환할 것인지를 두고 연일 격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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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011년 8월 조승수 대표가 9월 말까지 진보신당-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이 함께하는 '진보대통합당'을 건설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당의 진로에 대한 논쟁은 진보대통합에 찬성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의 문제로 압축되었다. 통합반대론자(이른바 독자파)들은 진보대통합이 '도로 민노당'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국민참여당은 통합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반면 통합론자(이른바 통합파)들은 진보대통합을 통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 전제를 포함한 전면적 선거연대가 가능하며 국민참여당은 조건부 통합 대상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같은 해 9월 당대회에서 3기 지도부의 진보대통합안이 2/3의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고 54.1%의 찬성으로 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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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통합론자들은 집단 탈당을 결행했다. 조직분리가 이뤄지는 국면에서 당의 운영은 비정상적으로 이뤄졌고 정치적 불안정성은 강화되었다. 김혜경 고문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가 출범해 가까스로 혼란을 수습했으나 당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2011년 11월 온갖 혼란상에도 불구하고 홍세화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당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홍세화 지도부는 우선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천명했다. 진보좌파정당 건설은 사회당을 비롯해 녹색당, 사회진보연대, 진보교연, 사회주의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 노동전선, 현장노동자회, 공공현장 등 통합진보당 좌측의 정당 및 사회단체에 광범위하게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사회당과의 당 대 당 통합 논의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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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합당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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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012년 3월 사회당과 진보신당은 역사적인 통합을 이뤘다. 당명은 ‘진보신당’으로 하고 총선 이후에 새로운 당명을 정하기로 했으며 홍세화 대표와 안효상 대표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총선이 임박한 시기였기에 합당과 함께 총선준비체제로 전환했다. 비례대표 전략과 관련해서는 '배제된 자들의 서사' 전략이 상정되었으며 김순자 울산연대노조 울산과학대지부장이 1번으로, 홍세화 공동대표가 2번으로 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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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1.13%를 득표하는 데 그쳐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이후 진보신당은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지속 추진하면서 2012년 대선 전략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진보좌파정당추진위'를 구성했다. 또, 이 시기 민주노동당 탈당 이후 진보정당운동에 결합하지 않고 있던 일부 노동정치 그룹이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 모임' 등의 이름으로 따로 모임을 구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쟁점은 진보좌파정당의 당명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법적 정당재등록의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지 등에 맞춰졌다. 이 쟁점들에는 당 외부의 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규정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당내 일각에서는 즉시 정당재등록과 대선 전 10월 당명 개정을 주장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재등록을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당 내 논의 과정에서 절충돼, 재등록을 추진하되 2013년에 당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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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진보신당은 '사회연대를 위한 2012년 대선운동'을 제안해 본격적인 대선 대비 체제로 전환했다. 이 제안은 진보신당이 자체적으로 대선후보를 선출하지 않고 '사회연대후보'를 공동대선운동기구가 조직하는 민중선거인단 완전경선으로 선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진보신당은 연립정부 반대와 독자완주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전제에서 진보좌파의 조직적 결집에 동의하는 세력과 대선에 공동대응하자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구상은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각에서 대선후보를 따로 선출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통합진보당에서 진보정의당이 분리되는 과정 등이 겹치면서 현실적 영향력을 갖고 추진되지 못했다. 따라서 대선 전술에 대한 당 내의 논의는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부가 선출하는 무소속 후보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보신당이 독자적으로 후보를 낼 것인지, 사실상 대선을 포기할 것인지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격론 끝에 당 내의 논의는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부가 선출하는 후보를 당의 후보로 받아들이되 무소속이 아닌 '가설정당'을 통한 대응을 제안하는 것으로 합의됐으나, 이는 무소속 후보 선출을 추진하는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후 진보신당의 지도부는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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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순자 지부장의 출마 기자회견 해프닝과 홍세화 대표의 사퇴가 이어지면서 대선 전술 논의는 혼란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이후 안효상 대표가 전국위원회에 독자후보 출마 및 좌파당으로의 당명 변경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대선방침안을 제출했으나 이는 부결됐고 안효상 대표는 사퇴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권한대행 체제의 당 지도부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부가 선출한 무소속 김소연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순자 지부장이 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일부 당원들이 이에 결합하면서 당의 대선 방침은 교란되었고 진보좌파세력의 2012년 대선은 사실상 실패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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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대선 이후 2013년 1월에 5기 대표단 선거가 있었다. 대표 선거는 이용길, 김현우, 금민 후보의 3파전으로 치러졌다. 창당 이래 처음으로 당 대표 경선이 치러진 것이다. 이용길 후보는 녹색사회주의 이념으로 진보정치를 '재건'하고 '재편'하겠다고 주장했고, 김현우 후보는 '조직노동'에 매이지 않는 반자본주의 무지개 좌파정당을 주장했으며, 금민 후보는 좌파대안정당을 통한 좌파정치의 새로운 10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이용길 후보가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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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길 지도부는 진보정치의 재건과 재편을 위해 전국위원회를 통해 '자본주의 극복·사회주의 이상과 원칙 계승하는 이념의 재정립, 보수야당과 구별되는 진보정당의 독자적 성장발전 노선, 대중정당·현실정당 재정립, 패권주의 일소와 민주적 절차 확립'이라는 4대 원칙을 확립했다. 또 애초 합의했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2013년 상반기 내 재창당 계획 등을 세워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 외의 세력과 긴밀히 소통했다.
지도부가 마련한 재창당안은 새로운 당명과 강령, 당헌·당규를 포함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새로운 당명과 관련한 것이었다. 1차로 전국위원회에서 선별된 노동당,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 좌파당 3개 당명을 대상으로 당원 전수여론조사를 거친 결과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으로의 당명 제정안이 당대회에 제출되었다. 
2013년 6월에 재창당을 위한 정기당대회가 열렸다. 강령 제정안이 먼저 상정되어 수많은 수정동의안을 다룬 끝에 강령을 제정했다. 이어서 당명 제정안이 상정되었다. 일부 당원들은 당대회 현장에서 '무지개사회당'을 수정안으로 제출했으나 부결되었다. 원안인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도 2표 차이로 부결되어 당명 제정이 무산되고 정기당대회는 폐회했다. 당명 부결 사건 때문에 당 내에서 극심한 논란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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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된 재창당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 2013년 7월에 임시당대회가 열렸다. 원점에서 다시 발의된 9개 당명을 대상으로 의결정족수인 2/3를 득표하는 당명이 나올 때까지 표결을 거듭했다. 39번의 표결을 거친 끝에 '노동당'이 2/3를 얻어 새로운 당명으로 가결되었다. 당명 제정에 이어서 상정된 당헌 제정안을 가결하고 임시당대회를 폐회했다. 2013년 8월에는 전국위원회에서 당규를 제정함으로써 마침내 재창당을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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